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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10-06 Hit 1322
Title
개혁주의 영성신학

 

개혁주의

영성신학

목 차

들어가는 말 / 1

A. 왜 영성을 가져야 하는가? / 1

B. 성경에 나타난 영성운동 / 3

Ⅰ. 영성이란 무엇인가? / 10

A. 영성의 정의 / 10

B. 성경적 의미의 영성 / 19

Ⅱ. 기독교 영성의 어제와 오늘 / 30

A. 어제의 영성 / 30

B. 오늘의 영성 / 40

Ⅲ. 개혁주의 영성 / 45

A. 개혁주의 영성의 특징 / 45

B. 개혁주의 영성의 미래 : 도전 / 49

C. 대안 : 개혁주의 세계관 / 66

Ⅳ. 영성 개발의 방법 / 74

A. 기도를 통해서 영성 개발을 시작해야 한다. / 74

B. 성경 연구를 통한 영성 개발을 해야 한다. / 105

C. 영성 개발의 마지막 단계는 영성 훈련이다. / 110

D. 영성 개발을 섬김과 선교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 112

맺는 말 / 123

들어가는 말

A. 왜 영성을 가져야 하는가?

1. 영성의 회복은 인간의 깊은 죄성 해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성의 기본 문제는 죄의 문제에서 시작된다. 죄란 관계적 문제인 동시에 우리를 허약하게 만드는 조건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란 단순히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칼빈이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avity)을 주장한 것은 바른 지적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서는 결단코 구원받을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칼빈이 말한 하나님 지식과 인간 지식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지적은 옳은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자신의 죄 됨과 본질을 보는 것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일어난다. 하나님과 만나보기 전에는 결단코 자신의 죄 됨을 보지 못한다. 본다고 해도 그 것은 성경적으로 틀린, 즉 도덕적 면에서 살펴본 인본주의 개념일 뿐이다. 솔직히 말해서 불신자 가운데도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죄 됨을 지적하지만 그것은 성경과 다른 도덕적 개념일 뿐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란 하나님을 모른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떠난 생활 자체가 죄라고 지적한다.

2. 우리가 영성신학을 강조하는 것은 영성의 회복 없이 인간을 켤코 참 행복과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그의 참회록에서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 할 때까지 안식하지 못합니다.”라고 고백한 것은 성경적이며 영원한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의 환경은 지금 이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눈에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찾고 있기 때문에 영성을 상실하고도 그것을 알지도 못한채 살고 있으며 또한 영성을 구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3. 우리가 영성신학을 연구하는 것은 여성은 천국에 대한 확신과 선교하는 일에 역동적 힘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성경의 바른 안내를 받지 않고는 영성을 회복 할 수 없으며 현실 속에서 역동적 삶을 살아갈 힘이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 연구는 영성 회복의 중요한 방법이다.

4. 우리가 영성신학을 연구해야 하는 네 번째 이유는 영성회복 없이는 침체된 교회를 회복할 수 없고, 또 참된 선교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성과 선교는 동전의 앞과 뒤처럼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세 가지 면에서 그렇다. 첫째로 기독교의 선교는 진정한 의미의 영성의 표현이요 연장이란 점이다. 진정한 영성이란 하나님의 소명과 인간의 죄 됨과 세상으로부터의 소외에 대한 응답이다. 그 결과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적 봉사를 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제자도의 필수 조건이다. 교회의 예배는 선교로 연결된다. 성서적 영성은 선교로 이어지고 선교에 참여하게 한다.

둘째로 교회의 영성은 선교로 이어지고 계속되기 때문이다. 기도와 영적 생활의 훈련은 은혜와 지혜와 영적 힘의 본질적 원천이다. 소명의 깨달음에서 선교적 사역을 하는 것은 자신의 영성에서 생기게 된다. 영성과 선교의 역동적 관계는 사도행전에 잘 나타난다. 예를 들면 안디옥교회의 장로들은 기도와 금식을 할 때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세우게 되었다(행131~13). 예수님의 생애에서도 그것은 분명했다. 예수님이 근방의 도시에서 설교를 하게 된 것도 그가 기도하는 데서(막1:35~38) 시작되었다. 바울의 경우도 그 역동적 관계를 고린도후서를 보면 그의 신앙과 기도와 순종과 사도적 목회를 하게 하였다. 선교는 영성의 기본인 기도 없이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바울의 경우에서 잘 볼 수 있다.

셋째로 선교는 참된 영성에서 일어나며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의 삶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이 마태복음28장16~20절이다.

19절에 보면 첫째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라고 했다. 여기서 “간다”는 말은 국경과 나라와 문화를 넘어서 가라는 뜻으로 선교를 의미한다. 둘째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라고 한 것은 교회 성장을 뜻하는 말이다. 셋째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했다. 이것은 교회교육의 중요성과 방법을 말씀한 것이다. 이것도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 단계는 가르치는 것이고 둘째 단계는 지킬 수 있도록 계속해서 훈련시키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 교회의 교육이 가르치는 데서 끝나고 있다는 단점을 볼 수 있다. 교육은 가르치는 것 뿐만 아니라 훈련시켜 그대로 살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5. 우리의 구원과 영적 진보의 삶을 위해 영성이 필요하다.

불교와 유교를 비롯한 동방 종교들은 구원은 영원한 교훈과 원리를 따를 때 얻는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듯 하나님의 진리는 내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그가 가르쳐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개인하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인(神人) 공동체를 만들어 인간사회에 개입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과 관련된 교회의 삶은 삼위일체적 삶의 확장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종말론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교회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연합한다. 그래서 영적 진보는 칭의에서 성화로 마침내는 영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B. 성경에 나타난 영성운동

1. 구약에서 살펴본 인간과 영성

영적 부흥이란 학개 선지자의 표현을 빌면 하나님의 은혜로 영이 흥분되어 깨어나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힘을 얻는 모임을 말한다. 이러한 영적부흥의 기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최초의 모임은 아마 시내 산에서의 집회일 것이다.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령은 곧 바로 가나안 땅으로 들이지 아니하시고 아라비아반도의 남쪽 끝에 있는 시내산 밑으로 인도하셨던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십계명이 새겨진 돌 판을 받으러 올라간 사이 백성들은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경배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들 백성이 금으로 부어 만든 우상을 섬기며 취하여 노래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노하셨다.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두 돌 판을 던져 그들중 얼마를 심판하셨다. 그리고 백성들을 징계하였다. 그리고는 그들이 만든 금송아지 우상을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물에 뿌려 그물을 마시게 하였다.

엠알 디한에 의하면 금을 태워 뿌려진 그물의 색깔은 과학적으로 볼 때 붉은 피의 색깔을 띤다고 한다. 이는 곧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의미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계약 백성이 되어 구원 받은 자가 범죄케 되었을 때 이를 회개하고 용서 받는길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된자가 그 마음에 다시 죄를 짓게 되어 마귀의 종노릇을 하게 될 때, 그 죄에게서 해방되는 것이 영적부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뿐아니라 구약성경 속에는 하나님앞에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길로 갔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께 들어와 회복되고 새로워지는 역사가 가득한데,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경균가운데 인도하시며 그들에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셨던 것이다.

성경에서는 영적운동이란 단어는 나오지 아니하나 부흥이란 단어와 그 의미가 같은 단어는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성구를 찾는 다면 "하야(HAYA)"로 하박국 3장 20절 여호와여......수년 내에 “부흥”게 하옵소서와 시 8:6절, 시 71:20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사 57:16 지존무상하며.....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구약에서 부흥은 “다시 살리리라”와 “소성케 한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단어와 의미는 차이가 있으나 역사적 면으로 볼 때 성경에 신앙운동이 계속적으로 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① 미스바 영성운동:사무엘이 국자적 중대사를 논할 때 이스라엘 민족을 소집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영성 운동이라 할 수 있다.

② 갈멜산 영성운동: 엘리야와 이스라엘 왕 아합과 왕비 이세벨과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 참 신적 대결의 살아있는 하나님을 알리는 승리의 운동으로 엘리야가 850명 을이기는 영적부흥운동이다.

③ 요시야왕의 도덕성 회복,율법교육, 하나님께 제사회복 운동으로써의 영적부흥운동이다.

④ 요나의 부흥운동:요나가 느니웨의 성민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살리는 회개운동이다

⑤ 에스라 영성운동:레위자손으로 아론의 16대손인 학사겸 제사장으로 율법에 익숙한 에스라가 율법교육과 이스라엘 종교적 전통을 회복시키고 무지를 깨우치는 영성회복 운동이다.

위에서 언급한 구약성서의 영적부흥운동의 특징을 살펴본다면 첫째:미스바 운동은 국가적 위기에 처했을 때 기도로 난국을 타개하려는 전 민족적이고 전 국가적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신앙운동이다. 둘째:니느웨 운동은 이방인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선교하는 영적부흥 운동이다. 셋째:요시야왕 영적부흥운동은 율법을 통해서 전국민을 회개시키는 신앙적 각성운동이다. 넷째:에스라 부흥운동은 하나님 말씀을 중심한 사경운동이라 할 수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명을 받아 십계명을 백성들에게 전하고. 지키게 하는등 백성들을 훈련시키고 가르피며,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아가도록 촉구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 할찌니라.”(신명기 6:4~9)

미스바의 신앙운동은. 이스라엘 사사시대의 마지막 사사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사무엘이 불레셋의 침략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이스라엘 온 백성을 미스바로 모이라고 선언하고 전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회개와 신앙 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삼상 7장) 구약 성서에 나타난 신앙 운동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엘리야의 갈멜산 신앙운동이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아합왕(876~854.B.C)당시의 선지자로서 왕후 이세벨이 우상을 섬기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여호와를 떠나 이방신을 섬기도록 강요하고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3년동안 이스라엘 땅에 비가 오지 않도록 했다.(왕상 17:1, 18:1)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서 이방 선지자 850명과 갈멜산에서 어느 신이 참 하나님인지를 겨루게 하였고, 결국 이 대결에서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임을 백성들은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갈멜산의 신앙운동으로 인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다시 회복되었으며 여호와는 이방신을 능가하는 신, 응답하는 신으로 인정을 받았고 동시에 바알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은 전멸 되었으며, 이 영적 대결후 그 땅에 비가 와서 오곡백과와 들짐승과 사람들이 생기를 되찾은 운동이 되었다.

니느웨 영성운동은 요나의 경고를 듣고,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멸망 받을 수밖에 없던 성읍이 구원을 얻었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구원이 그들에게만 제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었다.

요시야왕(640~609.B.C)은 그의 아버지 아몬과 그의 할아버지 므낫세의 정책들을 반대로 뒤집어 놓았다.

요시야의 종교개혁 가운데는 우상들과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성전에서 축출시키는 일, 종교적으로 매음행위를 하던 집들을 파괴하는일,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제사의 폐지,벧엘에 있던 산당과 제단을 폐지하고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업무집행을 하게 한일, 그리고 유월절을 축하하는 일 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은 실로 침체 일로에 있던 유다의 신앙을 회복시킨 운동이었으며 이제까지 우상숭배에 물두해 있던 종교적인 타락에서 회개를 촉구하고 전 국민적인 회개운동을 일으킨 놀라운 신앙각성 운동이었다. 이러한 일대 부흥운동은 순전히 율법서(성서)의 발견과 그 감화에 의함이었던 것임을 기억할 것이다.(열왕기하 22:1-23:25)

에스라는 레위자손 아론의 16대손으로(스7:5) 시드기야 왕 때 대제사장이던 스라야의 아들이요 모세 율법에 정통한 학사겸 제사장이었다. 에스라의 신앙운동은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스라가 성전에서 율법을 낭독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를 듣고 죄를 자복하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경배하고 기도하는 역사가 일어남으로써 신앙의 부흥을 일으켰던 것이다.(느헤미야 8:1-9)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고난중에 신앙과 소망을 잃어버리고 절말 가운데 빠져 자포자기 상태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에스겔로 하여감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군대로 소생하는 황상을 보게하고, 막대기 두 개를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는 명령을 통해.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고 신앙과 소망을 갖게 했고, 남.북으로 갈라져 같은 민족끼리 싸우다 멸망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로 통일될 것이라는 비전을 갖게 했다 (에스겔 37장)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구약 성서의 신앙운동은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예전자 등,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시대적 요청에 따라 주도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깨닫게 하고 신앙을 각성케 하며 소망을 주었던 것이다.

2. 신약의 영성부흥운동

첫째, 세례요한의 영성회복 운동

예수께서 오실 것을 고대하던 구약의 과도기 상태가 계속 되므로 선지자와 서기관들에 의해서 흩어진 디아스포라들이 각 회당에 모여 나름대로 교육을 지탱하여 오다가 세례 요한의 광야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소리가 있었는데 이제까지 침체되어 있던 신앙을 일깨워 주며 살아 움직이는 신앙을 불러 넣어주는 회개운동이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 영성운동

신약시대의 진정한 영적부흥과 사경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형식화 되어가고 외식화 되어가는 종교인들을 깨우쳐 참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살리는 운동을 하실 때 많은 무리들이 모여들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많은 사람이 신앙의 놀라운 능력에 사로잡혀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신 놀라운 사람의 운동을 실행하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성령을 보내주셔서 오순절 운동을 일으키셨다.

셋째, 오순절 성령운동

예수님의 승천 후 마가의 다락방에 보였던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은사를 체험함으로 사도들과 성도들이 하나가 되는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성찬식을 거행하며 찬미하는 기쁨의 영적부흥운동의 장을 찾아볼 수 있다.

이때 베드로의 회개운동과 말씀운동이 일어나 전형적인 교회 부흥운동과 사경회의 방향을 제시하였고 3,000명, 5,000명의 수적 증가도 찾아볼 수 있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신앙운동은 세례요한으로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의 메시야 활동의 길을 닦는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회개를 촉구하고 요단강에서 죄사함을 얻게하는 세례를 베풀었다. 세례요한은 이러한 활동을 통해 잠자던 민중의 신앙을 일깨워 주었고,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던 것이다.(마 3:1~12, 막1:1~8, 눅3:1~20, 요1:15~34)

다음은 예수님의 영성회복운동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신앙을 회복시킨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다. 그때까지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아직 체계적으로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여러 가지 교훈의 내용을 성실히 검토해 볼 때, 거기에는 하나님과 그의 교훈에 대한 새 정립의 필요성을 강조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세의 가르침이 그 당시 유대교를 대표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곡해되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생활이 왜곡됨에 대하여 예수는 불꽃같은 책망을 거듭하였다. 또한 예수님은 그의 설교와 삶을 통해, 그리고 대속적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교회가 세워져야 할 원리들을 가르치셨고, (교회의 생명이요 머리가 되셨다) 참 부흥운동의 모범을 부여 주셨다. 신약 시대의 영성운동에 있어서는 오순절 운동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예수의 11제자를 중심한 그의 추종자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 그들이 가끔 모이는 다락방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쓸때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행 1:12-14, 2:1-4)

“오순절의 영성운동은 성령의 강림으로 놀라운 확산과 역동적인 힘을 발휘하였다. 그 결과는 첫째, 그들이 조상적 부터 믿어온 하나님의 임재의 체험이었고 둘째, 그들이 성령의 지배아래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는것(행4:32), 셋째는 소유욕에서 벗어나 사랑의 실천 행동으로 유무 상통하였다는 점, 넷째는 방언으로 언어의 장벽까지도 철폐 되었다는 점, 다섯째는 전도열이 고조되어 그리스도의 복음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는 점이다.(행 2:42,47,4:1-12,5:29)

안디옥 교회의 신앙운동은, 스데반의 순교로 시작하여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게 되자 흩어진 주의 증인들에 의하며 시리아의 수도 안디옥에 국제적인 교회를 설립하면서 시작 되었다.

안디옥 교회 신앙운동의 특색은 순교적 신앙으로 선교 했다는 것과, 지도력을 갖춘 바나바와 바울을 유대에 있는 성도들에게 파송하여 돕도록 한, 사랑과 헌신의 영성운동 이었다는 것이다. (행 11:19~30)

바울과 실라는 아덴에서 전도 운동을 일으켰다.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를 거쳐 베뢰아에 이르러 성경을 강론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해를 받고 죽은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 난 것을 증거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다.(행 17:1-1)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의 박해로 말미암아 바울과 실라는 아덴으로 가게 되었다. 아덴에 우상이 가득 찬 것을 보고 바울은 마음에 분히 여겨 만나는 사람마다 변론하고 예수의 죽음과 몸의 부활을 전했다. 그리고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낼 때 바울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그 신을 내가 알고 있는데, 그 신은 바로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증거 하므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던 것이다.(행 17:16~34)

이상과 같이 신약성서에 나타난 영성운동은 세례 요한의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으면서 회개를 촉구하고 세례를 베푸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의 신약 교회를 세우는 메시야 활동, 그리고 “조직적 제자 훈련을 통한 교회 설립과 철저한 회개 및 성령이 충만한 제자들과 성도들의 충성스런 복음 전파에 의해 활발히 전개 되었던 것이다.”

I. 영성이란 무엇인가?

“영성”이란 말이 근래 자주 들려온다. 최근에는 개 교회에서나 신학교육현장에서 영성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그 예로써, ‘영적인 삶’, ‘영성’, ‘영성훈련’, ‘영성신학’과 같은 단어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기독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이 “영(spirit)"와 관련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영“의 형용사인 ”영적인(spiritual)"이라는 말에서 “영성(spirituality)”이라는 용어가 발생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A. 영성의 정의

1. 언어적 고찰

“영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성”(靈性)이란 말은 영어, “spirituality"를 번역한 말이다. 그러나 구미 학자들조차도 이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만족할만한 설명을 못하고 있다. 그래서 산드라 슈나이더(Sandra M. Schneider)는 그의 책 「신학과 영성」(Theology and Spirituality)에서 “영성이란 아직도 누구에게나 만족을 줄 만큼 분석적이고 분류된 정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고 고백하고 있다.

(1) 혼란스러운 사용

이처럼 “영성”에 대한 정의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안영권 교수는 그 이유를 “분명한 이해 없이 애매모호하게, 그리고 또한 잘못 사용”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송인규 역시 “영성” 이해의 어려움이 지극히 다양한 사용 범위에 있음을 지적한다 :

“이 말을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때 그 경우가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가장 빈번히 사용된 개념이 의문 없이 다른 경우에도 적용되거나, 사실은 별도로 생각해야 할 영역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수가 많이 있다.”

즉 영문 ‘spirituality,' 'spiritual’이 ‘영성,’ ‘영적,’ ‘신령한,’ ‘거룩한,’ ‘은혜로운,’ ‘영력(靈力)있는,’ ‘믿음이 좋은,’ 등으로 혼란스럽게 번역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유명한 기독교 저술가인 루이스(C.S. Lewis)는 ‘spirit,’ ‘spiritual'이라는 말과 관련하여 그 언어의 의미를 5가지로 밝히고 있다 :

그러나 많은 책에서 “영” 혹은 “영적”이란 말을 인간 안에 있는 상대적으로 초자연적인 것을 뜻하는 것으로 쓰기도 하기 때문에 많은 혼란이 빚어집니다. …… “영”, “영적”이라는 말이 영어에서 쓰이거나 과거에 쓰였던 의미들을 열거해 보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1. 화학적 의미 : '알코올(Spirits)은 매우 빨리 증발한다‘(영어의 Spirit에는 “알코올”이라는 뜻도 있음-역자주)

2. 의학적 의미(이 뜻은 이제는 통하지 않는 구식 의미) : 옛날 의사들은 인체에는 “기질(the Spirits)이라는 극히 미세한 액체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의학에서는 이런 견해가 사라진지 오래지만 거기서 나온 표현 중 아직도 쓰고 있는 게 있습니다. 기분이 좋다(in high Spirits). 의기 소침하다(in low Spirits). 말이 원기있다(Spirited). 소년이 동물 기질이다(full of animal Spirits)하는 표현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3. 단순히 “육체적”이나 “물질적”의 반대 개념인 “정신적” (Spiritual)이란 뜻으로도 자주 쓰입니다. 즉 사람 안에 있는 비물질적인 모든 것(감정, 정열, 기억력 등)을 자주 그렇게 부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의미에서 “정신적”인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비물질적이라는 사실 자체에 무슨 훌륭한 점이 있는 건 아닙니다. 비물질적인 것도 물질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고 중립적일 수도 있습니다.

4. “영”(Spirit)은, 모든 인간이 지음 받으면서 부여받은 상대적으로 초자연적인 요소, 즉 이성적 요소를 뜻하는 것으로 쓰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 그 단어의 가장 흔한 용법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도 ”영적“인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님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 의미에서의 ”영“은 피조물이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이 될 수도 있고 가장 나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들이 될 수도 있고, 악마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기독교 저술가가 “영”, “영적” 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인간이 자의로 신의 은혜에 복종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 될 때에 그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생명을 뜻합니다. “영적”인 것이 항상 선한 것은 오직 이 의미에서 뿐입니다.

한편 웹스터 사전은 “영(spirit)”을 “몸과 구별되는 인간의 지적 혹은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웹스터 사전은 현대인의 영 이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것은 영이 반드시 종교적이며, 초월적인 존재만을 의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영(spirit)은 인간의 지적 활동을 포함한다는 일반적 이해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웹스터 사전은 “영적인(spiritual)”이라는 단어를 설명할 때 역시, 그 단어가 종교적인 사건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일과도 관련이 되어 사용된다고 함으로써 “영”의 사용 용도가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영성” 역시 교회나 종교인(제사장 포함)에 관련되어 사용되기도 하지만 인간 영혼의 삶과 관련된 모든 관심에 적용된다.

결국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영성”은 우리로 하여금 그 단어의 어근이 되는 “영”이라는 단어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한다. “영”이라는 단어는 중요한 성경적 용어이다. 히브리어의 ‘루아흐’와 헬라어 ‘프뉴마’는 숨, 바람, 그리고 영을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인간의 영광 거룩한 성령 두 가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영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영성을 어떻게 이해하는 지가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용되는 “영성”은 이러한 일반적 설명을 뛰어 넘는다. 그래서 넬슨 테일러(Nelson Thayer)는 “영성이란 대단히 모호한 주제이다. 그렇지만 영성은 우리가 존재하는데 있어서 매우 본질적인 사항이기 때문에 영성에 대한 정의를 쉽게 단정지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

(2)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언어

두 번째로 “영성”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영성’이라는 말이 구약이나 복음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그야말로 오순절 이후 생긴 단어라는데 있다.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로렌스 지쳐즈(Lawrence O. Richards)는 ‘영성’의 불확실성을 성경과 관련지어 말하고 있다 :

영성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이처럼 불확실한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체험에 관하여 가르치기 위해 표상들과 관념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데에도 부분적인 이유가 있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표상들과 관념들 가운데는 열매, 성장, 성숙, 성화, 거룩, 사랑 등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영성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 우리가 영성에 대하여 명쾌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혼동 가운데 있는 대부분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예를 들어, 거룩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거룩 그 자체는 영성과 같은 것이 아니며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충분히 조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통합적 이미지도 아니다.

즉 영성은 성경적 용어로서의 표준이 없이 시대를 지나오면서 다양한 명칭으로 표현되고 있다.

영성이란 단어를 구미 유럽에서 맨 처음 사용한 사람은 1583년 영국인 필립 스투베스(Philip Stubbes)였다. 그는 자신의 책 「Anatomie of Abuses」에서 영국의 국교회의 신부들이 자신들의 지위와 권위를 함부로 남용하는 것을 반박하면서, ‘성직자(clergy)'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하다. 즉 직분에 성실하지 못함을 지적하면서 “그 영성의 남용들과 부패함”이라고 공박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기독교 역사에서 ‘영성’(Spirituality)이란 용어는 터툴리안으로부터 시작하여 초대교회와 각 시대 교회사에서 그 의미와 뜻을 달리하면서 사용되어 왔다. 즉 “영성”에 대한 이해가 시대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사전에서는 “영성”이라는 용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영성이라는 용어는 대단히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어 왔다. 프랑스인들은 이 용어를 삶에 대한 보다 뛰어난 인식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으며, 미국의 선험주의자들은 초월적인 지성을 특별히 가리킬 때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또한 종종 죽은 자의 영들이 이 땅에 살아있는 사람들과 의사 소통을 하게 되는 매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복음주의적 기독교에서는 보다 온화한 종교적 감정을 지칭하기 위하여 이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용어는 신약성서의 신도들의 독특한 속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고유하고 특수하게 사용된다.

이처럼 사람들은 ‘영성’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러왔다. 즉 단순한 ‘영성'(spirituality)은 좀더 구체적으로 영성신학(spiritual Theology)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며, 영적생활(spiritual life), 신심생활(信心生活, devout life), 초자연적 생활(supernatural life), 내면생활(inteior life), 신비적 상승(mystical evolution) 및 기독교 완덕(完德)의 신학(theology of Christian perfection), 수덕(修德)신학(ascetical theology)과 신비신학(mystical theology) 등의 용어로 표현되어져 왔다. 그리고 그 단어들의 의미는 그것을 사용하는 신학자에 따라 상당히 다양하다. 여기서 대표적으로 수덕(修德)신학(ascetical theology)과 신비신학(mystical theology)이라는 ‘영성’을 가리키는 용어를 카톨릭 측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사용하고 있으나, 개신교에서는 수덕주의(asceticism)를 고행이나 자기 부정의 실천을 언급하는데 보통 사용하며, 또한 신비신학이라(mystical theology)는 용어는 신비학, 심령술, 종교적 엑스타시, 특수한 심리현상 등의 초감각적인 것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등 부정적 의미로 많이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3) 초종교적 용어인 “영성”

‘영성’을 이해하기 어려운 세 번째 이유는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종교에 걸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용어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들수 있다. 물론 “영성”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먼저 사용한 용어이다. 그러나 오늘날 영성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서 모두 사용하고 있다.

“영성”은 일반적으로 ‘어떠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든지, 또는 누구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자기의 정신으로 내면화시켜서, 소크라테스의 정신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스토아 철학자들은 스토아주의 영성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영성이란 용어는 자기가 보기에 가장 이상적인 정신을 자기의 정신으로 받아들여 그 정신을 실천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거는 것을 의미한다. 심청전에 나오는 심청은 ‘효’라는 정신에 생명을 건 유교적 영성의 한 모범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힌두교의 브라만 영성, 불교의 니르바나 영성, 유교의 상제 영성 등의 용어가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개신교는 이 용어에 익숙하지 않다. 그것은 개신교에서 전통적으로 쓰여온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신교에서는 지금부터 겨우 30여년 전부터 영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어떤 기독교인들은 “영성” 이라는 말을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자력(自力)”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혁주의나 복음주의 써클에 있는 교회들은 이 용어에 대해서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였고, '경건(piety)' 혹은 ‘헌신(devotion)'이라는 말로 그 가치를 대신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경건은 시간이 지나면서 ‘교리에 대한 인정’의 지적인 부분으로 흐르면서 개혁주의 신앙이 경직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개혁주의 내에는 경건을 말하면서도 하나님과의 교재나, 삶의 문제보다는 신학적 전개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 교회에서는 다시 영성이란 용어를 통해 기독교를 이해하고 소개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몇 세기 동안 열렸던 신학 학술토론회에서 ‘영성’이라는 주제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던 사실을 생각할 때 현재 개신교의 “영성”에 대한 관심은 놀랄만한 일이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 모두 “영성”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개신교는 제6차 WCC 대회에서 중요 주제들 중 하나로 “영성”이라는 주제를 채택하였으며, 영성에 대한 주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1984년, 1986년, 1987년에 계속해서 협의모임을 열었다. 특히 WCC는 영성이라는 주제를 통해 타종교와의 대화를 유도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교계에서도 이러한 영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는데 1984년 4월 전국신학대학협의회(KAATS) 제19차 정기총회에서 ‘신학교육에 있어서의 영성훈련’ 이라는 주제강연이 있은 이래, 한국 개신교 내에 영성신학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2. 학자들의 제 견해

영성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종교적인 가치에 붙잡혀서 사는 영적인 삶의 상태”를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이 용어와 혼돈 하는 다른 한 표현인 경건(Piety)이라는 말은 “종교적인 의무에 충실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순수한 의미에서 영성(靈性)과 경건(敬虔)은 같은 종교 생활의 내용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 학자들의 “영성” 정의

그렇다면 기독교의 영성은 무엇일까? 넬슨 타이어(Nelson S.T. Thayer)는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 있어서 영성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 있어서 영성은 삶에 있어서의 궁극적인 힘과 의미의 원천에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들을 경험하느냐 하는 문제와 어떻게 우리가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관계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과 관계를 가진다. 영성은 단순히 내적 감정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경험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통합성과 일관성에도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영성에 관한 정의는 학자마다 그 의견을 달리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자

1) 심상태 박사는 “영성”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신심(信心;pietas)이라는 말과 관련되어 사용한 용어로서 “하나님 앞에서의 외경스러운 처사로서 인간과 자연에 대한 외경심의 표출”로 정의한 바가 있다.

2) 현대 독일신학자 판넨베르그(Pannenberg)는 영성이란 기독교의 메시지를 통해서 인간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요,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에 대한 추구라고 말한다.

3) 샤르뎅(Teil hard de chardin)은 “영성은 우주 생명 그 자체의 최고의 꽃핌이요, 최종 승화된 모습이며 우주 생명의 본질적인 마지막 종착역이라면서 하나님의 영적 현상으로 정신권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존재계의 현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4) 카톨릭 신한자 칼 라너(K. Rahner)는 “영성이란 인간이 창조때부터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초자연적 생명이며 세례로 말미암아 죽었던 속사람의 생명이 다시 소생하여 살아난 은총의 생명으로 성체 성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성장 성숙하는 실제적인 초자연적인 불멸적 생명이다”라고 정의하였다.

5) 홈즈(Urban T. Holmes)는 “기독교 영성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요, 그 관계는 감각 세계를 초월하여 주체의 노력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확장되고 고양된 의식으로서 인식하며 그 본질은 역사적 배경속에서 주어진 것이며 그 모습은 이 세상속에서 창조적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고 말한다.

6) 췌이퍼(L.S. Chafer)는 “참된 영성이란 성령 충만한 자 안에서 또한 그를 통해 나타나는 성령의 발현이다.”라고 하면서 인간의 영적 존재의 가치를 성령과의 관계에서 강조한다.

7) 김경제는 “영성은 지(知), 정(情), 의(意)를 통합총괄하는 인간 존재의 본 바탕이며 인간성 안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며 마음이 자신의 존재의 근거인 하나님과의 교류, 합일, 동역을 체험하는 영혼의 핵이요, 영성훈련은 본질적으로 성화의 과정이며, 영성은 인간 영혼의 독특한 고백이 아니라 삶의 현실과 역사 현실을 포괄하여야 하며 영성의 사회적 차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8) 오성춘은 “영성은 우리 속에 이루어지는 어떤 성품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의 과정이요,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고쳐 나가시는 과정이요,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받는 형제, 자매들 속에 나아가 그들의 삶에 참여하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9) 천병욱은 “영성은 성육신에 근거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현상으로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으로 세상 안에서 하나님께 대한 응답으로서, 교회의 사명을 완성하는 것이다.”라고 정의 하였다.

10) 황화자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사랑(요3:16)인 고로 기독교 영성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힌 바되어 그 넓고 깊고 높은 그리고 긴 그의 사랑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 구체화하면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길(행9:12)을 부단히 추구하여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사는 삶의 과정이다. 이러한 삶의 과정은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그리스동 안에(in Christ),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for Christ) 사는 삶이다.”라고 말한다.

11) 한성기는 “인간 속에 이루어지는 어떤 성품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의과정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삶과 인격으로 닮아가는 과정”으로 보았다.

12) 영성의 역사를 연구한 브레들리 P. 홀트(Bradley P. Holt)는 “영성이란 특별한 형태의 기독교 제자도를 말한다”라고 제시한다.

13) 메조리 J. 톰슨(Marjorie J. Thomson)은 “영성이란 영성생활을 할수 있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서 응답할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능력으로 좀더 실제적인 의미로 영성이란 이런 영적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영성은 우리들에게 신앙을 선택하게 하고, 가치 있는 일에 전녀하게 하며, 삶의 방식을 결정하고 신앙을 실첨하게 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형성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영성연구에 있어서 드러나는 분명한 사실은 영성이란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환경과 영향들과 관계를 가지면서 경험되어 진다는 사실들이다.

이러한 견해들을 종합해 볼 때, 일부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은 성령의 은사를 실천하는 신비적인 일이라고 보고, 다른 부류에서는 건전한 교리를 통하여 자아를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하고, 또 다른 무리들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김재성 교수는 이러한 영성의 다양한 정의를 “초월적 차원에 대한 열린 마음(openness to the transcendent dimension), 궁극적 실재에 대한 체험(the experience of ultimate reality),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한 실제적 경험(the lived experience of Christian belief)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의 총제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용어인 영성은 개혁주의 입장의 ”경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영성’이 개혁주의 신학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 신학과 영성

a. 신학의 객관적 원리와 주관적 원리

신학의 목적은 성경을 통해서 주시는 복음의 내용 즉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여 그들이 구원에 관한 진리를 깨달아 그 진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데 있다. 따라서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직접적 사역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성경을 객관적 원리로 보고, 신앙을 그 주관적 원리로 본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습득함에 있어 이성은 하나의 수단으로 쓰여질 수 있으나 결코 원리는 될 수 없다. 더군다나 이성이 판단의 기준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로 이성을 거슬러 가면서 다만 신앙으로 신학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학작업이나 목회 역시 신앙이 전제되지 않는 다면그것은 공허한 행위에 불과하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을 계시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그 믿음을 말한다.

결국 ‘계시의존신앙’(啓示依存信仰)이 아니고서는 참된 신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이 함께 역사하는 내적 신앙으로 성경계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만이 오늘의 신학과 교회가 살 수 있는 길이라고 할수 있다.

b. 신학과 영성의 관계

영성은 신학과 대조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카톨릭 교회는 수도원 운동과 중세를 거치면서 신비신학이 역사의 변천과정 속에서 수정 보완되어 영성신학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개신교 전통에서는 영성신학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할 뿐 아니라 신학과 영성을 합성하는데 대체로 회의적이었다. 왜냐하면 신학은 지적 훈련으로 하나의 학문이며 하나의 연구 과정인 반면에 영성은 인간의 삶의 질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것은 감정과 의지에 더 많은 관심과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영성을 말할 때 우선적으로 신비주의에 몰두한 자나 아니면 지나친 경건주의 자를 연상한다.

그러나 지적 훈련으로서의 신학은 영성과 대조되거나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학과 영성은 하나님을 찾는 서로다른 길일 뿐 그 목표가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학문과 경건이라는 말로 영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B. 성경적 의미의 영성

1. 구약의 영성

구약성경에서 ‘영성’(Spirituality)이라는 용어는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구약성경 속의 영성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우선, 구약전체에서 포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영(Spirit)'이라는 단어를 관찰하고 둘째로 구약에 등장하는 ’영성적 차원‘을 다루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1) 구약성서의 ‘영’

구약성서 역시 “영”과 관련된 용어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구약에 ‘영’을 의미하는 낱말 ‘루아흐(הוה)’는 히브리어로는 378회 나오고, 아람어로는 다니엘서에만 나타나는데 여기서 총 11회 언급된다. 히브리어의 ‘루아흐(הוה)’는 대개 “바람, 호흡, 공기, 영”등으로 번역되는데 이 단어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하나님의 영,” 혹은 “신적인 영”으로 이해된다.

슈탐(J. J. Stamm)을 비롯한 몇몇의 학자들에 의해 최근에 출판된 『구약의 히브리어와 아람어 사전』에 따르면 히브리어의 루아흐의 의미를 15종류로 구분 할 수 있다. 그러나 알베르츠(R. Albertz)와 베스터만(C. Westermann)같은 학자들은 ‘루아흐’의 기본 의미는 바람과 숨이며 더 이상 그 의미를 세분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한편 1919년 프랑스에서 출판된 「성경사전(Dictionnaire de la Bible Supplement)」에서는 ‘루아흐’를 신학적인 관점에서 분류하고 있다. 그 사전의 분류는 다음과 같다 :

"첫째, 하나님의 영으로서의 루아흐, 둘째, 왕들과 사사들에게 임한 원동력으로서의 루아흐, 셋째, 예언 운동에 나타난 루아흐, 넷째, 이사야서의 루아흐, 다섯째, “영의 사람”에스겔의 루아흐, 여섯째, 제사장 문서(P)와 제사예배에 관한 본문들에 나타난 주의 영광 거룩한 영, 일곱째, 역대기서와 다니엘서의 거룩한 영, 여덟째, 지혜서의 거룩한 영, 아홉째, 쿰란의 거룩한 영, 열번째, 헬레니즘과 영지주의의 영(Pneuma)"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분류들이 ‘루아흐’의 모든 의미를 완벽하게 담아낼 수는 없다. 그런 이유로 최근에는 이 단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포기하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다. 여기서는 크게 3가지로 분류하는 전통적인 분류체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루아흐는 전통적으로 세부류로 나누어 진다. 첫째, 바람, 폭풍으로서의 루아흐, 둘째, 사람의 루아흐(숨, 영, 생명력), 셋째, 하나님의 루아흐(영, 생명력)로 분류된다.

첫째로 자연현상으로서의 루아흐는 공기 혹은 바람과 관련하여 물질적인 의미로 131번 출현한다. 두 번째로 둘째 사람의 루아흐는 일차적으로 숨/호흡의 의미와 생명력/정서로 사용된다. 한편 신학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생명자체로서의 호흡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람이 살아있는, 숨쉬고, 생각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부족한 존재로서 생명가운데 거하지만 그 생명은 조정할 수 없는 제한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암호라고 할수 있다. 즉 하나님이 사람의 내부에 거주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루아흐가 사람의 영으로 사람에게 머물기 때문에 사람의 호흡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아흐’는 초월적인 존재와의 관련성 안에서 134번 나타난다. 하나님의 루아흐는 사람들에게 있는 일반적인 루아흐를 넘어서는 루아흐의 특별한 수여로 나타난다. 예를들면 카리스마적 지도자에게 임하는 현상인데, 이것은 계시의 매개체로 이해되어, 예언과 하나님의 루아흐는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다시 말하면 루아흐는 예언자를 통하여 활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루아흐는 일반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의 능력이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가리킨다.

이상에서 편의상 구약의 ‘루아흐’를 바람으로서의 루아흐, 사람의 루아흐, 하나님의 루아흐로 나누어 살폈지만 때에 따라서는 이러한 루아흐의 세속적 의미와 신학적 의미는 정확히 구분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구약의 ‘영’(루아흐)이라는 단어에서 영성에 대한 직접적인 지침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초월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의 “루아흐”는 주로 하나님과 관련되어 나타나며, 이 경우 그 단어는 “자연을 포함한 인간 영역 밖의 모든 사물”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것은 자연과 초자연을 구분하지 않고 단순히 인간적이 요소와 비인간적인 요소를 구별하는 히브리인의 사상에서 연유한다. 따라서 “이상한 영(extraneous spirit)”혹은 “사악한 영(evil spirit)”에 관련될 때도 이 단어는 사용된다(삼상 16:16; 18:10; 삿 9:23).

히브리어 루아흐는 우리가 그동안 논의했던 종교인의 “영성”을 충분하게 설명해 주지 못한다. 단지 구약성경에 나타난 “영”의 개념과 관련지어 생각할 때, 구약의 영성은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이라는 다소 초월적이며 애매한 한계성을 지닌다. 여기서의 초월성은 인간적인 요소 너머에 있는 모든 것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때로 “루아흐”는 인간의 슬픔, 분냄, 고통 등의 의미와 관련되어 사용된다. 이 단어는 후기에 와서는 지식체계(organ of knowledge)로 간주되기도 했으며, 인간의 의지(willing spirit)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또한 “루아흐”는 비물질적인 차원에서의 인간의 내적 의식(consciousness)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루아흐”에서 인간의 경건한 종교행위나 신비적 금욕주의와 같은 기독교 전통에서의 영성개념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넬슨 타이어(Nelson S. T. Thayer)는 ‘루아흐’를 통하여 적어도 다음의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여기서(루아흐) 다루려고 하는 주안점은 초월성의 역동성에 대해서 응답하고 참여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히브리어의 “루아흐” 영개념에서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구약의 영성은 초월적 세계와 현실적 세계의 교량적 역할을 하는 종교성이 될 것이다. 즉 구약성경의 ‘루아흐’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련을 맺음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능력과 삶의 영역을 암시적으로 제시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영이해에 기초한 구약성서의 영성은 영/육 합일체로서 인간이 하나님과 갖는 교제(communion), 인간의 존재 전 영역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encounter) 등으로 구약성서속에 표현되어 나타난다.

(2) 구약성서의 ‘영성’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실재와 활동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위대한 종교적 인물들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신 우일무이한 초자연적 존재로서 우주의 주이시며, 구원자와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려고 한다. 그러므로 이 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구약성서의 영성이해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이해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인간개념 속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특별히 개혁주의는 광범한 하나님 형상관을 가지고 있다.

박형룡 박사가 제시하는 하나님 형상의 주요 성분을 요약하면 우선 인격 혹은 영혼의 측면에서 인간은 영성, 불현성(不現性), 불사성(不死性), 등의 품질들과 지(知), 정(情), 의(意) 등의 심력들과 자의식(自意識), 및 자결정(自決定)의 권능들에서 신형상이 포함되며, 원의(原義)에서 지성적, 도덕적 완전이 포함된다. 신체에서도 영혼의 영생에 참여하는 적당한 기관으로 또 하등조물계에 주관권을 행사하는 기구로 외면적인 신형상이 포함된다. 또한 지상주관권(地上主管權)에서 권위적 신형상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구약학자 볼프(Hans W. Wolff)는 창세기 1:26-28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에서 세가지 영성적 차원을 지적했다. 첫째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친근성이며, 둘째는 인류의 공동체성을 셋째는 피조물에 대한 주권과 문화와 역사에 대한 위탁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영성의 기초가 된다.

따라서 나는 인간의 영성의 근본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 개념 속에 있다고 보며, 영성을 비세속적, 비육체적, 비인격적, 비윤리적으로 보는 이원론적 관점을 처음부터 배제하면서 전인격적이고, 윤리적이며, 세상과 사회 속에서 의미를 찾고 있는 성경의 영성 개념을 되찾아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박해령 교수는 구약성경 속의 영성을 ‘하나님의 존재의 표현’(상징언어, 속성),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법궤, 성막, 성전, 안식일), ‘해방자’(애굽, 바벨론), ‘계약자’(시내산), ‘관계 회복자 혹은 언약 갱신자’(새언약)의 측면에서 살피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구약성서의 영성은 하나님의 계약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이해에 그 기초를 둔 것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부른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삶,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즉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감을 최선을 다해 이룩하는 의미있는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추가로 구약성경에 나타난 영성을 구체적으로 다양한 관점과 본문에서 조명할 수 있지만 특히 영성 혹은 경건의 진수는 시편에서 발견되어지기에 김정우 교수의 논문을 참고하여 시편의 영성을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시편에 등장하는 시인의 경건과 영성은 수도원이나 금욕적인 삶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받은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시인은 자신의 내적 문제 즉 죄 때문에 씨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들은 오늘날 우리들의 영성 토론에 새로운 조명을 주는데 마치 우리가 훈련과 연습과 교육으로 온전한 영성에 이를 수 있는 것 같은 인상과 수많은 방법에 대해 근본적인 인간의 도덕적 무능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시편 51편은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고 죄의 용서와 새로운 창조와 성령의 임재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새로와질 때, 주께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고 주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셔야 비로소 우리에게 참된 영성이 이루어질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우리는 시편을 통해 소위 신비주의자들이 사모하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영적합일이 불가능함을 알게된다.

구약성경 영성의 중심에는 시내산에 계시된 토라(객관적 말씀)와 기도(애가, 감사, 찬양)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영성의 질과 내용과 방향과 성격은 시내산에서 계시된 토라에 근거한다. 계시된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참으로 영적이다. 토라를 떠난 영성은 있을 수 없으며, 진리를 떠날 때 이방인의 영성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를 경외하는 도’를 가르쳐 준다. 그리고 이러한 영성은 전인격적이며, 사회성과 역사성을 띠고, 세상에서 언약의 백성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2. 신약의 영성

신약의 영성에 있어서 구심점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집약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영성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하나님 체험, 그리고 제자들의 부활체험과 초대 교회의 성령강림 사건에 있다.

(1) 신약성경의 “영”

신약성경에 나타난 영성은 일반적으로 “영(spirit)”으로 번역되는 “프뉴마(πνεμα)”의 용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푸쉬케(ψμχη;생명 혹은 영혼)”은 “프뉴마(영)”와 “사륵스”(σαρξ;몸)의 결합에 의해 존재한다. 그러나 프뉴마는 대체로 영적존재를 의미하며 성령(Holy Spirit)이나 악령(evil ghost) 모두를 포함한다. 프뉴마는 비물질적이며 심리적인 상태를 나타내며, 가끔 내적인 존재를 지시한다. 동시에 프뉴마는 인간의 강한 욕망을 표현하며, 내적인 결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용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영성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고린도전서 2장 5절의 “프뉴마티코스(πνεματικος;one who is spiritual)”가 기독교 전통에서의 영성을 비교적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πνεματικως)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πνεματικος)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영적인 사람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초월적 영성을 지닌 사람으로서의 하나님의 일(성령의 사역)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다.

또한 프뉴마가 삶속에서 종교적 열정과 관련되어 사용된 흔적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열심히(spiritually) 주를 섬기는 일(롬12:11)과 “성령의 일이 곧 신령한 것”(πνεματικος)이라는 점(고전 2:13), 그리고 “신령한 자들(πνεματικοι)은 어떤 시험도 이길 수 있다”(갈6:1)는 사용은 모두 프뉴마가 열정적인 신앙생활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고전14:1).

에베소서 1장 3절은 “신령한 복이 하늘에 속한 것”으로 소개함으로써 “프뉴마”의 속성은 지상의 것이 아닌 초월적 세계에 관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에베소서 5장19절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주님을 찬양할 것을 외치면서 “프뉴마”는 초월적인 존재(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의 영적인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이 “프뉴마”는 초월적인 속성을 전제로 하며 동시에 세상에서의 종교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인간의 종교활동이나 신과 인간 사이의 교통에 관련되어 등장할 뿐 형식적인 사회 참여나 삶속에서의 적극적인 종교활동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런 이유로 해서 초대 교회와 중세교회에서의 기독교 영성운동이 개인적인 신비체험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것은 그동안 기독교 공동체에서 성령운동과 관련하여 개인의 구원체험이 곧 영성 운동의 일환으로 간주된 결과를 초래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2) 신약성경의 “영성”

영성은 하나님 아래서의 삶과 관련이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외형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계시되고 성령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아래의 삶과 관계가 있다. 그런면에서 사복음서는 영성에 대한 고전적인 표현이다.

스티븐 C. 바턴(Stephen C. Bartan)은 사복음서를 기초로 신약의 영성을 발견하려고 보력했는데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태복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영성은 우선 신적인 임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마태는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하는 영성을 강조함으로 구약과 연관을 맺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예수의 임재에 대한 약속이다. 즉 마태복음의 영성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둘째 마가복음에서 발견되는 영성은 어둡고 분투를 요하는 영성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즉 예수의 노정을 따르는 것은 그의 제자들에게 조차 벅찬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마가가 이러한 십자가의 영성을 강조한 이유는 당시 청중들이 다른 방향으로 너무 치우쳤기 때문이다. 즉 마가는 주님이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는 갑작스런 결말로 끝나고 있는데 이것은 주님이 이끄는데로 따르라는 소명을 준비시켜 주는 것이다.

셋째, 누가복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영성은 우선 노골적인 초자연주의의 주제이다. 즉 기적에 대한 반응으로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영성은 누가의 또 다른 책인 사도행전에 연결되어 나타난다.

넷째, 요한복음의 영성은 우선 개인적인 영성이라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인격적인 그리스도를 통한 인격적인 영성이 제시되고 있다. 반면에 요한복음에는 눈에 띄게 윤리적인 면은 거의 없다. 즉 마태와 마가에서 산상수훈과 같은 설교가 있다면 요한복음에서는 제자들과의 개인적인 가르침의 장면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즉 최소적 윤리주의 성격을 요한복음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21장 25을 통하여 예수를 알게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요 이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 과정임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요한복은은 제자들에게 개인적인 사랑을 묻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그것은 신앙이 개인의 도피처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야하는 길의 이유임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사복음서 속의 영성은 신약의 다른 책들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경건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라 본받는 삶을 살았으며, 또한 주의 성령은 그리스도의 약속대로 초대교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지식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다. 예수님은 경건한 자로 묘사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경건이야 말로 영성의 최고의 표현으로 가르쳐지고 있다.

눅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눅2:25)

요 9:31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9:31)

행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행 8: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행 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행 10: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행 13:43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행 13: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행 17: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행 17: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행 22:12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개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빌 4: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 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딤전 1:9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 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 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딤전 2: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 니라

딤전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딤전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딤전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 6: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 하면

딤전 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딤전 6: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딤전 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딤후 2: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딛 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딛 2:2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딛 2:7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딛 2: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히 12:2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약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벧전 4: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벧후 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강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벧후 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인내를,인내에 경건을,

벧후 1: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 2: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벧후 2: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벧후 2: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벧후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벧후 3: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유 1: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 1:15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유 1:18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처럼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영성이 아닌 경건으로 인정하고 표현하며, 가르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그러한 모습의 대표자로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건에는 신비주의적인 방향은 보이지 않으며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로 제시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II. 기독교 영성의 어제와 오늘

A. 어제의 영성

1. 고대교회의 영성

고대 기독교 시대는 30년경부터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us I, 280년경-337)하에서 기독교가 로마의 종교로 공인받을 때(313년)까지로 이 시기에 예루살렘에서는 원시적 공동체인 최초의 구체적인 교회가 나타난다.

(1) 초대교회의 영성

초대교회의 영성은 성령의 직접적 사역으로 시작되었다. 초대교회의 영성은 예수의 행적과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초대교회는 영성의 훈련과 생활이 잘 조화된 삶을 살았다. 이 생활은 구체적으로는 기도와 성경연구, 그리고 사랑의 모임이었는데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① 말씀공부(행2:42, 3:12, 고전 11:23, 15:11) ② 합심기도(행1:14, 2:4, 3:11, 4:32) ③ 교제(행2:42, 46, 3:11, 4:32) ④ 청빈, 구제, 봉사(행2:44-45, 4:32-37, 6:1-6) ⑤ 금식(행13:2-3, 14:23) ⑥ 복음전도(행1:8, 2:4, 3:11, 4:31) ⑦ 섬김(고후4:5) ⑧ 병자들을 위한 봉사(행3:1-9, 5:12-16, 19:11-12)

사실 초대교회의 영성은 플라톤주의적 영향과 영지주의와의 투쟁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다. 플라톤 주의의 흐름은 영혼이 영원한 세계로부터 내려와서 일시적으로 또한 임시적으로 우리의 육체와 관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몸이 죽으면 영혼은 영원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주장했다.

즉 이것은 인간이 지상 생활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의 중요한 점은 우선 인간의 금욕적인 생활을 통해서 다시 말하면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생활로부터 거리를 두고 정신적으로 떨어져 살면 우리가 영원의 세계와 통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기독교 이전부터 있었으며, 초기 기독교회도 어느 정도는 이러한 영향을 받았다고 볼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비기독교적 입장에 대해 지혜롭게 주의하면서 통전적인 기독교의 영성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은 이 사실을 강조하면서 죽을 때까지 예수의 행적과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였다.

사도시대가 끝나고 속사도 시대도 끝나 교부들의 시대에 들어서기 까지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의 탄압속에서 신음해야 했고 안으로는 이단운동이 발생하는 이중고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2) 터툴리안(Tertullian)

기독교 사상사에서 “영성(Spirituality)”이라는 용어는 터툴리안(약 160~220)에 의하여 처음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터툴리안은 라틴어를 사용한 첫 신학자로서 그 당시 헬라어로만 쓰여왔던 많은 용어들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spiritualis'이다. 이것은 헬라어의 ’πνευματικός(형용사; πνευματικώς:부사)'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즉 ’πνευματικός‘는 초대교회 시대에 두가지 의미를 지닌 용어로 쓰여졌는데 첫째는 단순히 육체와 정신(영)을 구별하는데 사용되었고, 두 번째로는 한정된 삶 속에서의 육체성을 극복하는 것을 성령의 역사로 보고, ’πνευματικός‘를 '정신적'(mental)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영적‘(spiritual)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초대교회적 바탕위에 터툴리안은 ’spiritualitas'(‘영성’, spirituality)의 의미를 신학적 차원에서 발전시켰다. 이로서 그는 헬라적 사고로 본 ‘영(정신)’을 세상의 육체성과 동일시하였으며, 인간의 ‘영’을 성령의 은사로서의 ‘영성’ (spiritualitas)과 극심한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구별하였다. 즉 ‘영성’은 세상 그리고 자연인간의 영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터툴리안에 의해 발전된 이원론적인 ‘영성’과 ‘세상’ 사이의 상반성은 두가지 극단을 가능하게 했는데, 하나는 영성을 위하여 세상을 등지는 방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육적인 세상을 기독화시키는 방법이다.

교부시대에는 이런 이원론적 구분의 서적과 더불어 고대 신비종교의 영성이 교회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2세기에 나타났던 몬타누스(Montanus)는 초대교회에 있어서 대표적인 성령운동자였다. 그는 본래 키베레(Cybele)라는 페르샤로부터 수입된 종교의 신부(神父)였다가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몬타누스는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 이미 이교(異敎)에서 신비스런 황홀경에 드어가는 체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신비체험은 종종 ‘예언’ 또는 ‘방언’으로 나타나곤 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의 예언은 마치 새로운 계시로서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치하는 성령의 시대의 시작의 강조라고 하였다. 그것은 마치 예수가 '로고스‘(Logos)의 수육(受肉)이었던 것과 같이 몬타누스 자신이야 말로 성령이 몸을 이룬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였다. 그는 금욕주의적 수도단체를 조직하였는데 이 단체에 가입하는 사람들은 아내도 가산도 모두 버려야 했다. 그리고 오직 금욕생활과 황홀한 신비적 체험만을 일삼도록 하였다.

몬타누스 운동은 종말사상과 금욕사상을 강조하는 성령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점은 그리스도 없는 성령을 전개한데서 신앙이 균형감각을 상실한데 있다. 이러한 몬타누스의 사상이 터툴리안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다.

(3) 어거스틴

고대교회에 있어 신학을 체계화 시키고 영성운동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사람은 어거스틴이다. 어거스틴은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 마니교에서 생활하였고, 신플라톤주의 철학에 심취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회심한 후 어거스틴은 희랍철학과 이교사상에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그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찾아 오신 아가페 사랑을 강조하게 되었고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 대신에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신학 역시 이원론적인 색체가 드러난다. 예를 들면 어거스틴은 결혼보다는 독신을 권장했고, 수도원 운동에 앞장섰다.

어거스틴에 있어서 영성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사랑만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힘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어거스틴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영적 인식과 영적생활에 필수적인 것은 인간의 영혼 깊은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었다. 물론 어거스틴은 믿음을 무시하지 않았지만 다만 순서를 바꾸어 말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경건과 영성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었다.

2. 중세교회의 영성

중세 로마교회는 기독교를 의식의 종교로 만들었다. 모든 것이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성직제도(聖職制度) 밑에서 통제되었고 실천되었다. 구원론이 교회론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중세교회의 영성운동은 초대교회 말기 금욕주의 사상을 받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보편적으로 종교적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엄격한 독신생활을 강조한다고 알려져 있는 중세교회의 수도원 운동은 기독교가 세속적이며 이교적 사고방식에 적응하려는 것 때문에 일어난 저항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후 313년 이후, 즉 기독교가 공인을 받고 박해없는 시대가 되면서 적극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중세의 수도원 운동은 도피적인 은둔적 정신운동이며, 개인주의 운동일 뿐 아니라 성경의 말씀과는 거리가 먼 금욕주의적인 고행주의를 중심으로 한 비복음적 운동이라고 비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수도원 운동을 통한 영성훈련은 당시의 형식적 형태만 남은 교회 속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는 활력소가 되었다. 즉 수도원 운동은 은둔, 독거, 묵상, 노동, 검소, 청빈, 극빈, 성경연구, 기도, 침묵, 예배 등을 통해 영성훈련을 쌓아 인간 영혼의 신적 상태로의 상승을 목표로 일어난 운동으로 비록 문제점도 많았지만 이들의 활동은 당시 교회의 이단들을 회개시켰으며 성직자들을 각성시켰고, 선교에 열심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교육과 성경번역 사업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세교회는 봉건제도 위에 설립되었고 교회 재산의 수입이 증가됨에 따라 그 본래의 영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도원도 로마교회라는 체제하에 예속되어 있었음으로 중세 카톨릭교회의 교황체제하에서 제도화되어 버렸다. 따라서 수도원은 카톨릭교회의 교회주의적 경건을 형성시킬 수밖에 없었다. 즉 사도바울이나 어거스틴이 강조했던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경건’이었다. 이것은 교회와 수도원의 계율을 잘 지키고 나아가서는 선행도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실적을 쌓음으로서 구원을 얻는데 공로의 보탬이 되는 공로 사상과 결부된 사랑이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밟게 되면 영적성취와 구원의 확신이 상응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엄격한 훈련과 금욕생활일수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실적을 많이 쌓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은 공로사상이 포함되어 있는 ‘경건훈련’은 일부 평신도들에 의해서 거부당하기도 하였다. 소위 왈도파(Waldo)라고 불리웠던 사람들은 반체제 영성운동의 하나였다. 그들은 성령과 성경 그리고 은혜의 교리등을 강조하였으나 중세교회신비주의 영성체제하에서 정면 충돌을 일으켜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유명한 성 프란시스(St. Francis)의 탁발승 운동도 중세교회의 경직된 교회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났던 운동이었으나 교황청의 인가를 얻고난 후 그들의 영성운동은 쇠약해졌고 모처럼 그들이 표방했던 ‘청빈’도 잘 지키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중세교회의 영성운동이 교회주의적 획일성을 특징으로 하고 이었으나 반면에 영성을 촉발시키는 두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스콜라 신학이요, 다른 하나는 독일을 무대로 발생했던 신비주의 운동이다.

(1) 스콜라 신학의 영성

스콜라 신학자들은 기독교 교리의 철학적 변증가들이었다. 그들은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한 논리와 이론을 전개 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당시 유명한 스콜라 신학자들은 동시에 수도원의 명승들이요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수도원이나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으면서 그리스도교 진리에 대한 신비한 사색과 탐구를 임삼고 있던 사색가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빌려서 시도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연과 영혼의 밀접하고 단계적인 관찰을 통하여 하나님과 만나는 경지와 영계의 실재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스콜라 철학자나 신학자들에 있어서 자연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고 영계의 신비를 매개하거나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자연은 영적 신비의 진리를 계시하거나 보여준 마스크와 같은 것이며 동시에 영계가 인간에게 접근하는 매개체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관찰은 인간의 영혼이 영계로 가는 신비한 순례의 무대요 길이었다. 그리하여 순례의 마지막 단계는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이었다.

(2) 신비주의 영성

중세의 신비주의의 문제는 그리스도가 없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영교를 통해서 신과 신비적으로 연합(Unio Mystica) 하려고 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대다수의 신비주의자들은 몰아(沒我)의 지경에 빠져 인간의 영혼과 신성이 연합하는 순간 기가 막힌 황홀감 즉 엑스타시를 느낀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은 범신론적 연합을 의미한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탈선된 영성운동이었다.

예를 들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마음의 초연(disinterest)을 통해서 신과 합일 될 수 있다고 하였는데 마음의 초연은 마음을 무(Nothing)와 공(empty)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불교에서 주장하는 무와 다를바 없다.

그러나 성 버나드(St. Bernard)의 신비주의는 사랑과 겸손의 수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매개로 하여 하나님의 실재성에 도달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사색과 실천을 겸한 신비주의자로 활약하였다.

중세기 말에 이를 것 같으면 화란에서 실천적인 경건한 신비주의자들이 모여 영적 각성운동과 수도원 개혁운동을 일으켰는데 이들을 가리켜 공동생활의 형제단(The Brethern of the Common Life)으로 불리웠으며 그들의 표어는 “오늘의 헌신”(Devotio Moderna)이었다. 이들은 평신도들의 수도단이었으며 결코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아니었다. 이들은 기도와 명상과 전도 그리고 성경을 읽고 필사하여 보급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들은 침체 상태에서 허덕이고 있던 수도원을 각성시키고 개혁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 운동의 창시자는 제라드 그로테(Gerard Groote)였으며, 그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이 저 유명한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èmpis)였다. 그의 저서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는 번연이 쓴 「천로역정」과 같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지는 경건한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루터가 기독교적 영성과 경건을 맛보았던 것은 그가 공동생활의 형제단에 속한 형제들로부터였다.

3. 종교개혁의 영성

종교개혁 당시는 루터가 수도원을 탈퇴함으로 영성운동에 큰 변화를 가져온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종교개혁운동은 중세 교회가 제도와 전통의 기구와 권위에 치중함으로 상실했던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다시 회복하며 하나님의 신되신 주권을 그의 교회와 역사 속에서 인정하자고 하는 운동이었다. 또한 종교개혁운동은 이와 함께 칙령과 회칙, 그리고 수도원의 규칙에 매인 심령을 풀어주고 성경의 진리로 돌아가 순수한 기독교를 재발견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시대의 영성의 중심은 성경이었다. 개혁자들은 말하기를 영은 말씀을 통하여 말씀 안에서 역사하며, 성령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 있는 구원과 계시의 실재를 지금, 여기서 신앙인의 것이 되도록 현재화 시키는 ‘보증자’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바로 칼빈이 주장하는 내적 증거이다.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은 이것을 피조물과 죄인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서 이해하였다. 이들은 또한 인간은 오직 은총에 의해서만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고 믿었다. 이러한 종교 개혁의 운동이야 말로 기독교의 영성운동이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의 영성운동을 고찰하는 것은 종교개혁시대의 영성운동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된다.

(1) 루터의 영성

중세기 기독교 신학의 특징은 스콜라주의적 합리주의와 신비주의적 황홀경험, 그리고 일반적인 도덕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합리주의는 이성을 근거로 하여 신에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인간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이성을 근거로 한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전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였다. 루터는 수도원 생활을 통해서 합리주의와 신비주의, 그리고 도덕주의의 사닥다리를 다 올라가 보았지만 모두 한계 상황에 부딪치게 되었으며 결국 성령의 능력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루터가 생각한 성경과 성령의 관계는 다음이 두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성령은 말씀 없이는 말하지 않으신다. (2)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말씀안에서 말씀하신다.

이것은 말씀이 먼저 나타나지 않고서는 성령을 주시지 않으며, 하나님은 말씀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성령을 주신다. 또한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 안에서 역사 하시는데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성경은 단지 문자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만이 “그리스도는 주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으며, 오직 성령만이 그리스도를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선포하실 수 있다. 성령은 말씀을 배우는 길을 평탄하게 하신다. 성령은 들은 말씀을 삶에 적용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들어도 그것을 우리 안에서 역사하게 하는 것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뜻하시는 자 안에서 뜻하시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그리고 결코 말씀 없이는 아니하신다.

이런 면에서 루터의 영성운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그의 은혜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루터의 신학은 성경과 성령, 신앙의 객관적인 측면과 주관적인 측면이 역동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루터에게 있어서 도덕은 신앙의 결과일뿐 그 원인은 될 수없었다. 루터의 궁극적인 목표인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그 믿음은 성경메시지의 전적 수용이고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이다.

(2) 쯔빙글리의 영성

영성에 대한 쯔빙글리(Zwingly)의 중심사상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들의 종교의 근거는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자라고 고백하는 것과 하나님 만이 만물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만물을 자유롭게 주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쯔빙글리가 종교개혁운동을 시작한 것은 바로 그의 성경연구로 인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한데서 비롯되었다.그러므로 이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하에서 발생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또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이 존재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무한(無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심지어 이방인들의 선행도 하나니의 주권적인 성령의 활동의 결과라고 하였다. 가령 소크라테스도 하나님의 선택에 속한 것으로 생각한 것은 일반 은총영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일반적 섭리의 범주안에서 인식하려고 시도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쯔빙글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강조했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와 공로로 인한 구원을 주장했던 로마교회의 주장을 비난했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람이나 회의에서 결정한 사항이나 칙령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게 인정하려는 것은 미친 짓이며 신성모독이다. 만일 그러한 천명이 하나님의 말씀과 비슷하다해도 사람의 권위에 의한 것은 아니고 말씀에 의한 것임에 틀림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비슷하지 않다고 하면 배척하며 멀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이 철학으로부터 하나님의 본질됨을 이끌어 낸 것은 모두다 부끄러운 거짓 종교일 뿐이다. ……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몸소 아들과 성령을 통해서 말씀하셨음으로, 우리는 인간적인 지혜로 우쭐대면서 본래는 순수하게 받은 지혜를 더럽게 한 그들로부터 무엇인가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신탁)으로부터 이것들(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찾는다. 사람이 이러한 올바른 길을 무시하면 온통 육적인, 즉 철학의 허구에 빠지게 될 뿐이다. …… 우리는 스스로 타락을 방지하고 혐오스러운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본질됨을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쯔빙글리의 영성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한데 있다. 쯔빙글리는 최소한 이론으로 그의 전 신학을 성경으로부터 이끌어 내기를 원했다.

(3) 칼빈의 영성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속에서 성령론을 취급하면서 중생(Regeneration)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다루고 있음을 볼 때 그는 루터의 이신칭의에서 멈추지 않고 그의 관심이 성화(Sanctification)에로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칼빈의 영성은 처음부터 ‘경건(pietas)’과 ‘지식(eruditito)’이라는 용어로써 표현되고 있다. 요셉 리챠드(Joseph Richard)는 칼빈의 영성을 연구한 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이 칼빈의 영성은 경건이라는 말로 집약되는데 경건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바른 태도, 진정한 지식과 진정한 예배를 포함한, 예배의 진정한 태도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용어이다. 지상적 삶은 하나의 순례이며 지상적 삶의 즐거움은 하나님을 향한 봉사의 적절한 통합을 요구하는 하나의 여행이다. 칼빈은 창의와 성화를 영성과 깊이 관련지어 설명하는데 즉 영성에 대해서 칼빈은 칭의의 우선성을 강조하면서도 성화와 분리될 수 없는 연결성을 강조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신비적인 결합을 의미한다. 또한 칼빈 영성의 주요 범주인 경건은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절제된 인간의 태도이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갖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칼빈의 영성은 삼위일체적 구조안에서 성부에게 탁월한 역할을 부여한다.

이것을 요약하면 칼빈의 영성은 우선 그의 두가지 지식과 관련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람에 대한 지식이다. 칼빈은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자하면 동시에 우리 자신의 실존적인 모습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 둘은 동시적인 상관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스스로 처해 있는 상태가 비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서 주권자요 영원한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보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깨닫게 될 때 인간이 유한할 뿐 아니라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식은 성령으로만 가능하며 성령은 말씀으로 역사하신다. 즉 성령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다. 성령님이 진리에 대해 중거한다는 것은 이것을 의미하며 이때야 비로소 인간은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지만 타락으로 인하여 그것을 상실하였다. 우리는 그 형상을 그리스도 에게서 발견하게 되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발견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을 인식하고 회복하는 삶 즉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화되어 가는 삶의 연속이 되어야 하며 그 성화되어 가는 삶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또 그리스도인 스스로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칼빈사상에 있어서 영성의 핵심이다.

4. 근대교회의 영성

종교개혁 이후의 영성운동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17세기부터 19세기 까지의 기독교는 다시 한번 전세계적인 종교가 되기 위해 유럽을 기점으로 하여 움직이면서 많은 새로운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대부분의 기독교의 관심은 대체로 새로운 문화 발달, 도시화 산업혁명, 국가간의 전쟁 등 유럽과 아메리카의 문제들에 초접을 두었다. 그리고 비교적 젊은 개신교회들과 카톨릭 교회와 정교회에서 영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들이 발달되었다.

개혁시대가 끝난 후 많은 개신교 운동들은 세단계의 발달을 거쳤다. 첫째는 신앙고백의 시기였다. 이 시대의 지도자들은 교리를 지적으로 정의하고 옹호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둘째는 경건주의 시대로써 특히 영성이 감정적 차원에서 일반인들의 욕구에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을 요구했다. 마지막으로 이성주의 시대 또는 계몽주의 시대인데 이 시대는 자율적 이성에 대한 비판에 성경과 교회의 관습이 관련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합리주의는 종교의 역할을 우주의 윤리적 규범을 가르치는 것으로 축소시켰으며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관계 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합리주의 종교성은 오랜 시간동안 교회에 영향을 미쳤으며, 경건주의와 더불어 양대 사상의 흐름으로 교회를 인도해 왔다. 결국 개혁자들이 회복한 영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 중세의 영성으로 돌아서기 시작했으며 그 양상은 다르지만 개혁주의 경건이 약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이 시기에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은 청교도들에 의해 유지되었는데 청교도 신학은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도록 예정되었다는 확신으로 인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개인생활과 사회생활 전체를 요구했다. 특별히 청교도 영성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측면에서 강조되었고 이러한 청교도 신학의 뿌리에는 칼빈의 영향이 자리잡고 있었다.

B. 오늘의 영성

1. 영성의 재등장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강조했던 변증신학이 영향을 미치는 동안 교회는 영성문제를 다룰 수 없었다. 즉 칼 바르트의 계시신학에 의하여 ‘종교’와 ‘계시’를 서로 대조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신학사상안에서는 ‘영성’에 관한 것은 아예 ‘종교적인 행동’으로 간주하며 무시하는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즉 모든 영적 노력과 행동은 종교적 행위로 간주하였고 디트리히 본훼퍼의 신학에 이르러 역시 종교성 없는 시대와 사회를 언급하였디 때문에 영성에 관한 내용은 관심이외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완전히 변하기 시작했다. 즉 반작용으로 포괄적인 종교성의 재발견되기 시작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다양한 계층의 단체들에 의해서 영성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면 여성단체들, 아시아인들, 미국 장로교의 중산층 남성 백인 그룹들, 흑인들, 미국인디안 원주민들에 의한 영성에 대한 고취를 들수 있다.

1971년 독일의 신학자이며 작가인 뵐버(Hans-Otto Wölber)는 “오늘날의 경건”(Frömmigkeit heute)이라는 연구논문을 출판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삶의 차원을 세가지로 나누고 있다 :

① 이성적 차원(인간은 사고하고 연구하며 계획, 분석, 비판한다.) ② 사회적 차원(인간은 공동생활을 하며 살아간다.) ③ 초월적 차원(인간은 자신의 한계와 삶의 메마름을 체험한다. 그리고 죽음에 관해 생각하며 신비의 세계와 현세를 넘어서는 곳에 까지 흥미를 느끼고 관심을 쏟는다.) 이 마지막 세 번째의 차원을 소홀히 하는 냉냉하고 소음많은 세상은 인간을 자신과 모든 다른 것으로부터 소외되고 멀어지게 하며 이렇게 된 인간은 자아체험과 자연적인 삶 그리고 초월적인 것을 찾으려 발버둥 치며 반항하게 된다.

이러한 뵐버의 논문은 시대의 사조를 정확히 예견한 것이었다. 이 논문이 발표된지 4년후 ‘영성’ 이라는 신학이 성령론과 에규메니칼 운동을 통하여 관심을 사게 되었다.

1975년 나이로비에서 열렸던 제5차 에규메니칼 총회는 새로운 “영성”이라는 용어를 받아들였다. 이 총회의 준비 모임이 1975년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있었는데 여기서 “영성(Spirituality)”에 관한 작업이 있었다. 이러한 작업의 목적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영적자원들을 모두 찾아냄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애쓰며 싸울때에 이를 위해 필요한 영적 조건을 갖출 수 있게 하기 위함이며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현 시대의 요구에 더 잘 맞는 공동체의 삶을 교회들에게 본보여 줄 수 있게 하기위함이었다.

지난 1991년 2월 호주 캔버라에서 개최된 제7차 WCC총회에서 하버드 신학대의 신약학 교수인 크리스털 스텐달은 “생명을 위한 에너지-오소서 성령이여! 온 우주를 새롭게 하소서” 라는 또 하나의 주제 강연에서 성령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① 성령을 인격이 아닌 온 우주에 생명을 부여하는 에너지로 보았다. ② 다윈의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인간과 우주의 연속성과 동일성을 강조하면서 성령을 인간과 우주를 연대시키고 우주에 생명을 불어넣는 우주적 영으로 파악했다. ③ 성령을 온 인류와 종교를 하나로 묶는 에너지로 보았다.

여기서 스텐달은 성령을 우주적 생명의 생성에너지로 보는 범재신론적 성령론을 피력하고 있다.

또한 영성에 대한 비슷한 관념이 카톨릭교회 안에서도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1984년 탄루트(Tantur)와 예루살렘에서 열렸던 ‘카톨릭신학기구 협의회’는 영성형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특별히 카톨릭은 제2차 바티칸종교회의를 정점으로 신학을 평신도들의 것으로 돌리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 왔는데 이중 하나가 교회 성직자를 중심으로 하는 영성의 전환이다.

한국교계에서도 이러한 영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는데 1984년 4월 전국신학대학협의회(KAATS) 제19차 정기총회에서 ‘신학교육에 있어서의 영성훈련’ 이라는 주제강연이 있은 이래, 한국 개신교내에 영성신학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복음주의 또는 개혁주의 입장에 있는 교회가 아닌 한신대측, 감신대 출신의 민중 해방신학자들에 의해 소개되고 있다. 감신대 방석종 교수는 이러한 입장을 고백하고 있다.

(영성이)상당히 새로운 지식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진보그룹의 개혁적인 사람들이 그들에게 없는 공허한 것을 메꾸기 위해서 어떤 경건한 모습을 보충, 그것 중화시키려 하다보니 또 하나의 이론인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인간적인 수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회개운동이라든지 깊은 종교 체험을 하는 것 보다는 그러한 인간의 계획 프로그램에 따라서 준 신학차원으로 내려서 이것을 자기네 방편으로 쓰려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2. 현대 영성의 배경

그렇다면 이러한 현대에 재등장한 여성운동 혹은 영성신학의 배경에는 어떤 사상들이 있는가?

첫째, “영성”에 대한 관심은 오순절 주의, 성령운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세속도시(The Secular City)」를 쓴 Harvey Cox는 그의 새로운 책「Fire from Heaven」에서 성령운동의 발전을 현상학적으로 고찰하면서 영성의 문제를 깊이 관련지어 다루고 있다. 특히 3부 11장에서는 ‘순복음교회’의 성장을 예로 들어 한국에서 오순절 운동이 “영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즉 “영성”에 대한 강조는 성령운동의 윤리적 취약성에 대한 인간의 성화훈련인 내면화를 향한 복고적 반응의 일환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영성”은 성령운동에 대한 하나의 반작용이 아닌 동참하는 것으로도 볼 수도 있다.

둘째, “영성”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일환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종교다원주의의 철학이 작용했다. 특별히 19세기 말에 등장한 문화인류학과 종교학은 문화공동체에 대한 정체성으로 종교를 연구하면서 종교간의 상호차이보다는 유사점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사점을 공통적으로 부르기 위해 “영성”이라는 넓은 의미의 용어를 사용하려는 경향이 짙다. 특히 최근의 학술지에는 불교와 기독교, 유교와 기독교 등 종교간의 영성을 비교함으로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히는 글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바탕에는 토착화와 다원주의의 철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셋째, 영성의 등장은 현대성이 보여준 한계와 연결되어 나타난 또 하나의 대안이었다. 정보통신의 발달, 물질주의와 다변화사회를 지향하는 현대성은 과학주인공의 시대를 다시 인간 중심으로 그 관심을 전화하고 있다. 즉 정체성을 잃어가는 교회와 개인은 결국 더 초월적인 경험을 갈구하게 되며, 이러한 갈구는 동양종교나 신비주의로 그 향방을 정하고 있다. 현대성이 가져다준 중요한 문화적 결과는 세속화(secularization)이다. 피터 버거(Peter Berger)는 세속화를 “사회 및 문화의 각 부분이 종교적 기구나 상징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현대성에 대한 반동에 부응하듯 교회역시 너나 할 것 없이 평범한 교회생활을 떠나 부단히 새로운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중 영성훈련이라는 영적 체험을 강조하고 인위적인 체험까지도 방법론을 통해 이루려는 노력으로 보여진다. 즉 경건의 회복이 아니라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는 자들에게 내용이 없는 헌신과 자기만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영성”의 관심은 복음주의 교회의 사라지는 생명력에 반비례하여 나타났다. 개혁자들이 회복시킨 기독교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퇴색하기 시작했다. 청교도의 영성은 경건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점차 그 생명력을 잃어갔으며, 특히 서구 기독교는 너무나 많은 일에 관심을 가짐으로 정작 보수해야 하는 신앙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서구 기독교는 십자가 없는 기독교를 선교하기 시작했고, 특히 WCC와 같은 교회 협의회는 선교에 대한 개념을 변경하면서 생명이 아니라 인권과 해방에 더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기존의 교회들 역시 세속화의 영향으로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타락했고, 기독교는 더 이상 거룩한 종교가 아니었다. 이러한 기존의 복음주의 교회들의 변질은 기존에 복음주의 노선에 있던 많은 신자들을 오순절 계통과 카톨릭에 놓쳐 버리게 된다. 그리고 교리와 인권을 통해 너무나 인간적인 세상에 머물러 있는 교회의 대안으로 떠오른 운동이 바로 영성회복이라는 문구를 가져온 것이다. 이러한 영성운동은 오순절 계통의 성령운동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한국 개신교내에서도 기존의 장로교단의 교회교육 형태가 점차 오순절 방향으로 바뀌고 또한 영성운동에 치우치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다.

Ⅲ. 개혁주의 영성

A. 개혁주의 영성의 특징

영성에 관한 관심이 증대하고 영성훈련이 각 기관에서 실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성이해는 개인적인 경건의 영성에서부터 사회적 해방의 영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뿐 아니라 영성운동이 한국교회 안에서 양극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경향이 강하다. 개인적 경건을 강조하는 영성운동은 사회적 해방의 차원을 세속주의로 간주하고, 사회적 해방을 강조하는 영성은 개인적 경건을 신비주의 내지 도피주의로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두가지 양극적인 흐름은 아직도 영성에 대한 개혁신학적 전통의 이해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고 있다.

1. 은총의 신앙에 입각한 영성

개혁신학은 은총이란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라고 믿는다. 개혁신학은 인간 행위에 의해 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분명하다. 이 말은 사람이 자신만으로는 의롭지 않으나 그리스도의 의가 구에게 전가되며 전달됨으로써 의롭다함을 바는다는 것과 같다. …… 참으로 여기서는 저 경박한 생각이 사라지고 만다.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의롭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 경박한 사상은 위에서 말한 교리와 반대되는 것이며 도저히 조화시킬 수 없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도 “믿음은 성령께서 복음을 통하여 내게 불어 넣어 주시는 굳건한 확신입니다.” 고 말한다. 이러한 은총에 대한 강조는 영적훈련과 행위의 의에 대한 거부에서 나왔다. 중세의 영적수련은 신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로서 비영적인 상태로부터 신과의 연합의 상태로 나아가는 인간적인 방법이었다. 이러한 중세의 영적 수련은 다른 세속적 책임에서 벗어나 전 시간을 영적 삶이 추구를 위하여 바칠 수 있는 수도원의 테두리 안에서 시행되었다. 이 중세의 영적 수련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걸하기 위하여 인간의 공적을 쌓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행위의 의에 대해 거부했다고 해서 영적 삶에 대한 중세적인 모든 훈련에 대하여 적대적이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 특히 루터는 지속적으로 개인기도와 비밀기도, 가족 명상, 성경에 대한 헌신적 반성의 필요성을 높게 평가했다. 이러한 헌신적 삶의 개인적 훈련은 항상, 설교, 찬송, 공적 기도와 공부 그리고 성례전에 대한 잘 준비된 준수 등 공적은혜에 대한 수단과 병행되게 되어졌다. 은혜는 아무런 공로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질 지라도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헌신함으로써 이 은혜의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이란 신자가 하나님에 대하여 열려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요구에 민감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에 반응하는 것이다.

2. 공동체 신앙의 영성

종교개혁의 전통은 어떤 형태의 사유화된 종교를 거부한다. 예수에 대한 인격적 관계에 만족하고, 제자됨의 수평적 관계를 무시한 어떤 경건도 거부한다. 이 세상사에 대한 관심을 멀리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상실한 어떠한 영적 실천도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에 위배되는 것임을 보았다.

칼빈은 개인적 형태의 경건을 정죄했다. 그는 “개인적 독서와 명상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여 공적 모임을 멸시하고, 설교를 피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자들의 확신에 대항하거나 교만과 혐오에 의하여 인도하는 자들”을 우습게 보았다. 칼빈은 당시 재세례파의 가르침과 실천이 비성경적임을 비판했다. 우리 한국 사회 안에서도 1992년 10월에 예수 재림을 주장했던 시한부 종말론과 각종 불건전한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도 역시 사회성과 교회의 연합성과 친교를 깨뜨렸다.

개혁주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택하신 신자의 구속에 대한 강조이다. 하나님은 성도의 공동체를 언약의 맥락속에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하여 부르셨다. 그러나 개혁 전통은 신앙공동체를 경멸하거나 자기가 신앙의 공동체에서 형제나 자매보다. 우월하다는 개인주의적 영성으로 나아가지 아니했다. 오히려 개혁신앙의 전통은 이러한 영성을 타자를 위한, 봉사를 위한 능력의 원천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청교도의 경건주의 신앙은 사회봉사를 위한 윤리로 발전했다. 칼빈주의 윤리는 개인주의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세계 내적 금욕주의를 통하여 자본주의의 정신을 낳았다.

개혁 전통은 인간 본성에 대한 죄의 침투성(pervasiveness of sin)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개인들은 항상 그들의 종교체험이 그들의 욕망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잘못함으로써 왜곡되거나 환상으로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신앙공동체에 의한 교정을 필요로 한다.

공동체 신앙은 구체적인 예배, 선포된 말씀의 경청, 성례전의 공동적 집행에의 참여에서 표현된다. 신자들은 공동체와 유리되어 개별적으로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서 구속된다. 신자들은 예배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신앙의 의미를 배운다. 신자들은 공동적으로 선포된 말씀에 노출됨으로써 우리가 누구인가 지속적으로 기억하게 된다. 신자들은 전교인들이 모인 기도의 삶에 참여함으로써 기도하기를 배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개혁 전통내에서 사적 기도 훈련을 위한 역사적 처소가 있다. 칼빈은 예수님이 기도를 위하여 조용한 처소로 물러난 것을 지적하면서 기도를 비밀이라고 정의하였다. 기도란 “원리적으로 가슴속에 거하며, 모든 우리 속에 가득차 있는 걱정으로부터 정적(靜寂)을 요구한다.

1640년 채택된 「웨스트민스터 예배지침서(The Westminster Directory for the Worship of God)」는 아주 최근까지 비밀 내지 개인예배 네 부분의 항목을 내포한다. 기도 성경봉독, 거룩한 명상과 진지한 자기시험이다. 최근의 예배지침서에는 이 항목은 성경봉독, 기도, 하나님에 대한 조용한 기다림, 말씀에 대한 명상, 자기 헌신, 봉사에의 헌신, 등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은밀한 기도의 각 부분들은 공적 기도에 의하여 균형되고 이웃과 나눌 때 진실로 유지된다. 그러나 이것들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홀로 행해져야 한다.

홀로 기도하지 않는 자는 공적 기도시에 가져갈 것이 없고 스스로 성경을 읽지 않는 자는 설교를 들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경건의 개인적 형태와 공적형태는 서로 균형 잡혀야 한다. 칼빈은 이 개인 기도와 공적기도의 양면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경건자들의 거룩한 무리에서 기도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마다. 개별적으로 은밀한 처소나 집에서 기도하는 것을 모르는 자이다.” 홀로 개인적으로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는 자는 ‘공적 모임에 자주 간다’ 하더라도 단지 ‘바람잡는 기도’만 할 뿐이다.

3. 감정과 이성의 균형잡힌 영성

개혁 전통은 지성의 온정한 사용이 없는 감상의 위험(the danger of sentimentality)을 경계한다. 감상이란 조심스런 사고보다 감정을 더 우선하는 과도한 정서주의(excessive emotionalism)이다. 정서란 신자들에게 신뢰할 것이 못된다. 느낌이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도 스스로의 병리적 필요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개혁전통이 감상을 거부하는 것은 이러한 개인적인 느낌을 추구하는 경건의 형태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감상주의는 느낌을 계시받는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써 인간적으로 오도된 상상으로 빠지게 된다. 감정이란 위험스럽게 오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정은 이성과 균형있는 관계속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접근할 때 우리의 감정은 이성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대각성운동의 창시자인 요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열과 빛의 유비를 사용하여 사상과 감정 사이를 필연적으로 연결한다. “느낌있는 열정적인 가슴과 같이 이해에는 빛이 있어야 한다. 빛 없이 열만 있는 곳의 그 가슴속에는 신적이거나 하늘의 어떤 것도 없다. 다른 면으로 열 없이 빛 종류, 개념과 사변만이 있는 머리가 있고, 차갑고 느낌 없는 가슴만이 있는 곳의 그 빛 속에는 신적인 것은 없다.

칼빈도 신앙이란 지성과 감성, 머리와 가슴의 통일로서 신자의 인격에 형성된다고 말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도 진정한 신앙에 있어서 지성과 감정의 두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계시하신 모든 것은 진실하다는 것을 알고 믿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전한 은혜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나도 역시 죄를 용서 받았고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의롭게 되었으며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을 성령께서 복음을 통하여 내게 불어 넣어주시는 굳건한 확신입니다. ”

개혁 전통은 단순한 감정적 정서에서만 치우치지 않고 그것을 말씀의 빛에서 오는 지성을 통하여 검증한다.

4. 경건에 기초한 지성의 영성

칼빈에 의하면 신앙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이 주어진 약속의 진리에 근거하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계시되고 우리의 가슴에 새겨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실하고 확고한 지식이다.

여기서 지식이란 단지 ‘이해’(comprehension)만이 아니라 지각을 넘어선 어떤 것(something beyond sense perception)이다. 가슴없는 머리 지식이란 우리를 설득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는데 충분하지 않다. 신뢰는 신앙의 가슴이기 때문에 정서는 신앙의 행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칼빈 이후 정통 칼빈주의자들은 이 신앙과 이성을 분리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칼빈주의자가 구프린스톤과 위스트민스터의 정통주의로 발전하면서 지성과 감정의 균형잡힌 신앙은 바른 교리적 선언에 대한 승인(assent to the correct doctrinal formlas)으로 변질하였다. 종교개혁적 이신득의에 의한 구원은 바른 교리와 신념과 사상에 의한 구원으로 왜곡되고 기독교적 삶이란 바른 교의에 대한 수납으로 환원되었다.

네델란드의 개혁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는 오순절 사건의 난해성을 속직히 토로하였다. 성령의 편재성과 연속성과 불변성에 근거하여 성령이 오순절에 오셨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성령은 이미 존재하는 곳에 다시올 수 없다. 구약시대는 성령이 가랑비와 같이 내렸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하여 택함을 입은 자인 교회의 동맥에 강과 같이 쏟아 부어졌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 그리하여 신자와 주님과의 영적일체가 이루어졌다.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유기체를 말한다. 이제는 성령이 오순절 강림을 통하여 이미 교회의 저수지 안에 충만히 와 있다. 신자들은 연결관을 통하여 저수지에 연결되어 있다. 수도꼭지를 틀기만 하면 언제든지 성령을 공급받을 수 있다. 카이퍼는 오순절 성령강림은 근원적인 강림이고, 사마리아, 가이샤랴, 고린도에서의 성령역사를 보충적 강림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은 반복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리하여 카이퍼는 오순절에 온 성령은 유대인 교회를 대표하며, 고넬료 가정에 임한 성령은 이방인 교회를 대표하여 임한 것으로 해석하여 이미 성령이 저수지에 충만하게 임하여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을 다시 기대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이러한 성령강림에 대한 카이퍼의 견해는 성령론을 관념론화시켜 버렸다. 이러한 카이퍼의 견해는 프린스톤 학파의 워필드(Benjamin B. Warfield)에 의하여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예언, 치유, 방언과 같은 특별은사는 사도시대에서 그쳤다는 관념이 정통 장로교회나 `개혁교회의 주요 교리가 되고 있다. 보수적 장로교에서 신학적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는 워필드는 기적들이 사도들과 더불어 끝났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노력을 경주한 자이다. 그는 1918년 「가짜 기적」(Counterfeit Miracles)이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이 저서는 「기적들:어제와 오늘, 실재와 가짜」(Miracles:Yesterday and Today, Real and Counterfeit)라는 재목으로 재출판되었다.

이 저서에서 워필드는 사도적 교회는 기적을 일으키는 교회였던 반면, 기적적인 영적 은사들은 “사도적 교회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지나가 버렸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 미국 칼빈신학교의 은퇴한 조직신학교수인 회크마(Anthony Hoekema)와 워스트민스터의 신약학 교수 개핀(Richard Gaffin, Jr.)에 의하여 주장되고 있다. 회크마는 사실적으로 1800년간의 침묵 후에 방언현상의 소동은 심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방언을 성령이나 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심리현상으로 해석한다. 회크마는 특별한 기적이 은사는 사도들에게만 적용되며, 그들과 더불어 그쳤다는 워필드의 견해를 반복하고 있다.

개핀의 견해 역시 워필드와 회크마의 노선 위에 있다. 개핀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오순절 성령강림은 단회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서 반복될 수 없다. 따라서 신자들은 회심 대 이 단회적인 오순절 사건에 경험적으로 참여해 성령세례를 받았음으로 제2의 축복이란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 영성은 바른 교리적 명제에 대한 승인이나 일치보다는 설득, 내적인 증언과 확신에 대한 재발견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재발견은 정서와 사상, 감정과 지성, 체험과 지식 사이의 균형을 재발견하며, 감정을 두려워 하지 않는 영성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5. 현실세계에 대한 긍정의 영성

개혁신학의 전통은 이 세상으로부터 유리된 어떤 경건을 거부한다. 신자의 경건적 실천과 그의 직업, 가족과 사회적 삶에 대한 이 실천의 영향 사이에 어떤 분리가 있을 수 없다. 구체적인 이 세상으로부터 영적 세계를 분리시키는 어떤 경건도 위험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

창조를 가상으로 본다거나 경제와 정치의 삶을 기독자의 삶보다 열등한 것으로 무시하는 경건의 형식은 개혁전통에 낯설다. 영과 육 사이를 엄격히 구분하고 영을 쫓는 것을 선으로 보고 육을 악한 것으로 간주하는 가치판단은 희랍적이고 불교적이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영지주의적 가르침이 참된 경건성의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역설했다.

바울과 요한의 가르침은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thinking of dichotomy)를 정죄하고 있다. 칼빈 역시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를 배격했다. 그는 죄가 감성적 육혹에 의하여 이 세상에 들어 왔다는 일반관념을 거부했다. 그는 “불신앙이 야망(ambition)에의 문을 열고 야망은 반역을 야기했다”고 역설한다. 야망은 육체의 좌가 아니라 마음과 영의 죄이다. 죄는 인간 삶의 총체성 곧 사고, 느낌, 행동, 정치, 경제, 경건 등에서 표현된다.

육에와 영혼의 이원론을 거부했기 때문에 칼빈은 자연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로서 축하할 수 있었다. 이 선한 창조는 하나님에 의한 은혜로운 제공으로서 인간이 사용하도록 의도하신 것이다.

개혁전통은 이러한 건전한 세상성(sound Worldliness)을 인정한다. 그래서 영적훈련의 목표는 신자를 이 세상으로부터 제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행동하도록 더 잘 준비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영적 삶의 목적이란 이 세상에서의 삶의 방식과 경건이 통전되는 것이다.

칼빈은 세상과 분리된 중세적 수도원 체제를 거부했다. 그것은 그가 그들의 영적 실천과 이상을 무시한데 있지 않고 거룩과 세속 사이의 분리를 철폐하고자 한데 있다. 수도원 삶은 육에 대한 엄격성 때문에 물리적 세계를 대가로 치루고 영혼을 찬양하는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웃과의 삶을 거부하고 하나님과의 삶만을 추구했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영적 훈련을 세상에서의 하나님 전백성의 삶으로써 통전시키고자 했다. 칼빈은 이러한 이원론적 영적 사상, 세속을 포기하고 수도원으로 퇴각함으로써 진정한 영적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본 재세례파의 사상을 거부했다. 칼빈은 세계 내적 경건을 강조했다. 명상적 삶이란 이러한 일상적인 삶과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밀접한 관계속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이제 수도원적 명상은 매일 가족의 아침 기도와 저녁기도로 시행되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종교개혁 전통이 “매 기독교적 가정이 세상 속의 작은 수도원이다”라고 해석한 것은 기독교적 영성이해에 하나의 큰 공헌이었다.

이러한 세계 내적 영성은 기독자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힘과 활력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 내적 영성은 자칫 세대의 조류에 너무 쉽게 적응해 버리는 약점도 가지고 있었다.

6. 초월적 영성에 근거한 내재적 영성

개혁전통의 영성은 세속주의적 영성을 거부한다. 기독교 영성이란 인간이나 세속적 정신에서 나오지 않고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성령의 능력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현대 해방신학은 기독교 영성을 해방의 영성으로 세속화 시킨다. 해방신학은 영성을 역사속에서 정의의 실천으로 이해한다. 해방의 영성은 전인적, 총체적 삶을 통한 실천을 강조한다. 해방신학은 전통적 기독교의 영성이 영적 요소만을 부각시켜 하나님의 초월성만을 강조하고, 인간 실존의 육체적, 물질적 요소를 무시함으로써 하나님의 내제성을 소홀히 했다고 비판한다.

구티에레즈(G. Gutierrez)눈 사회정치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투쟁을 강조한다. 소브리노(J. Sobrino)는 해방의 실천이 없이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없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해방의 영성이란 박해로 점철되는 ‘투쟁속의 사랑의 영성’(spirituality of love -in-conflict)이다.

해방의 영성은 정의의 실천을 강조한다. 해방신학은 전통적 기독교가 사랑과 정의가 불가분의 관계속에 있는 것을 등한시해왔다. 해방의 영성은 정의로운 사랑을 강조한다. 사랑은 바로 사회정의를 통하여 올바르고 효과적으로 실현된다고 본다. 해방의 영성은 희생자와 사회적으로 억눌린 자의 울부짖음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역설한다. 해방의 영성은 해방자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해방의 영성은 역사적 인물 해방자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역설한다.

현대의 여성해방신학자들은 여성해방 영성(feminist apirituality)을 강조한다. 그것은 남성 지배의 가부장적 체제에서 남성에게 종속되고 억압되어 소외된 여성의 자율성, 여성의 자기 실현, 여성의 자기 초월을 고무한다. 그리하여 여성해방 영성은 가부장 제도가 여성의 존엄성과 권리를 억압한다고 보고 이 가부장 제도로부터의 해방을 역설한다.

이러한 현대 해방신학, 여성신학, 민중신학의 해방의 영성은 영성이 갖고 있는 사회적 연관성을 강조하는 공헌이 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는 이웃과의 의로운 관계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특히 이세상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갖히고 병들고 소외된 자에 대한 연민과 연대로서 표현되어야 한다.

선지자 미가와 아모스가 선포하는 것처럼 ‘정의를 실천하고 인자를 행학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이 진정한 신앙과 경건의 표현이다.

예수님께서도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오실 때 의인과 악인을 양과 염소처럼 구별하시는 표준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대한 태도라고 역설하신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25:45)

해방의 영성은 기독교의 영성이 자칫 개인주의적 영역에 갇혀 인간에 대한 의로운 관계를 망각하거나 소홀히 할 수 있는 데에 대한 영성의 사회적 관계성을 강조하는 공헌이 있다.

7. ‘그리스도 영’의 고유의 영성

개혁신학 영성은 현대의 혼합주의 영성을 거부한다. 혼합주의 영성은 현대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제창되고 있다.

1971년 희랍정교회의 대감독인 조지 코드(George Khodr)가 WCC중앙위원회에서 행한 강연 “다원세계 안에서의 기독교-성령의 섭리”(Christianity in a Pluralistic World-the Economy of the Holy Spirit)에서 보편주의적 성령론을 주장했다.

"그리스도는 겸손의 신비 가운데 어디서나 숨어 계신다. 그래서 세계 종교들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브라만 교도나 불교도나 모슬렘들이 그들의 경전을 읽으며 은혜를 받았을 때 그들이 빛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 우리는 이제 비기독교적 종교들도 성령이 역사하시는 장소로 간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타종교 안에서 보편적으로 역사하는 우주적 그리스도와 우주적 성령을 주장하고 있다.

인도 신학자요 10년간 WCC 종교대화 분과 위원회의 회장을 역임한 사마르타(S. J. Samartha)는 “성령과 다양한 신앙, 문화, 이념의 사람들”(The Holy Spirit and People of Various Faiths, Cultures and Ideologies)이라는 논문에서 성령이 교회 안에서만 역사하고, 석가나 모하메드나 간디나 마르크스나 모택동에게는 역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생동력과 창조력과 성장을 증진하는 사역, 의미와 보람과 진리를 부여하는 사역, 나눔과 교제를 도와주는 사역가운데서 역사하는 성령의 다양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혼합주의 영성은 기독교의 성령을 무속종교의 신명(神明)이나 기(氣)로 왜곡하고 있으며, 또한 힌두교의 브라만 영, 불교의 니르바나 영, 유교의 상제 영과 혼동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영은 나사렛 예수 안에 나타난 성령에 의하여 증언되지 이슬람이나 불교나 유교에 나타난 영에 의하여 증언되지 않는다. 기독교는 타종교에 계시된 익명의 우주적 그리스도를 전혀 알지 못한다.

8. 세계내적 검소(frugality)의 영성

개혁신학은 하나님 안에서 이 세계를 긍정한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처소요, 누리고 향유해야 하는 축복의 장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소유에 집착하고 세상의 연락에 도취되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우리의 소유가 우상이 될 때 그것을 포기할 줄 아는 태도가 요구된다. 따라서 소유에 대한 태도가 기독교 영성에 중심적이다. 칼빈은 개혁적 경건성의 고전적 태도 가운데 하나가 구제(almsgiving)라고 했다.

그것은 물질적으로 궁핍에 처한 자에 대하여 헌신적으로 돕는 영적 삶의 훈련이다. 칼빈은 구제를 중보기도(intercessry prayer)와 연결시킨다. 중보기도는 다른 사람을 돕는 다른 길이다. 이것은 물질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그러나 이웃의 궁핍에 대하여 무엇을 하는 것 없이 이웃을 위하여 기도할 수 없다. 기도와 행동은 불가분적으로 함께 속한다.

금식(fasting)도 세계 내적 경건성에 속한다. 금식은 탐욕과 방탕으로 나아가는 자연적 경향을 교정하는 것이다. 칼빈은 금식에 은유적 의미를 부가시켰다.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음식의 제한과 금기가 아니라 어떤 다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의 과정을 통하여 경건한 자의 삶은 참으로 검소와 절제로 길들여져서 가능한 대로 그것이 금식을 닮도록 하는 것이다.” 금식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소유를 잃는 두려움의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하 두려움은 우리 신앙과의 타협으로 쉽게 나아간다.

개혁전통 안에서의 금식은 세 가지 중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첫째, “금식은 육신을 약하게 하여 복종케 하며, 그것이 자의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한다.”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충성에 이차적이다.

둘째, 금식은 기도와 명상을 위한 수단이다. 금식은 우리의 정신 상태를 변화시키고, 우리의 기도가 깊이 상달케 한다.

셋째, 금식이란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겸비함에 대한 증언이다.

공적금식이란 공동체의 죄과를 고백하는 목적을 가지며 회개에 대한 공동체적 표시이다. 청교도들은 이러한 공적 금식을 규칙적으로, 특히 씨가 땅에 묻히는 봄에 실행했다.

미국 개신교에 있어서 금식의 관습이 행해지지 않게 되자 에드워즈는 그의 목회 시절에 있어서 금식에 대한 강조의 결여에 대하여 언급했다. “비밀금식이 비밀기도처럼 정해진 방식이나 지속적인 과정으로서 시행되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나 모든 고백하는 신자들이 시행해야 하고 자주 시행해야 한다고 본다.

미국 개신교는 에드워즈 이래로 금식이 개신교의 영적 훈련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리만큼 소홀히 해왔다. 그리하여 금식이란 로마 카톨릭교회의 훈련이거나 체중감소나 억압받는 자들과의 연대의 표시로서 이해되어 왔다. 금식에 대한 망각증은 경제적 영역에 있어서 신자의 풍요와 관련된다. 물질적 성공은 소유의 풍요성을 당연하다고 본다. 소유가 많을수록 금식의 훈련이 어렵게 되었다.

미국 장로교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우리 한국교회도 최근 들어서는 물질적인 풍요를 하나님의 축복으로만 생각하고 금식의 훈련을 게을리 하게 되었다.

9. 그리스도를 닮는 성화의 영성

거룩성이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고, 우리를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의 축복에 참여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신득의(justification)는 신자의 삶의 목표가 아니라 시작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은혜안에서 자라야 한다. 이것이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이다. 성화의 삶이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것에 대한 즐겁고 감사하는 반응의 삶을 사는 것이다. 죄가 항상 우리 가운데 현재할지라도 우리는 죄의 소욕을 만족시키지 않고 그리스도를 닮는 새로운 인간으로 날마다 변형된다. 이것이 성화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골3:9-10) 그리하여 우리속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고, 그의 신비스러운 현재와 더불어 사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 찬가(Christus hymnus)는 성화의 목표로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제시하고 있다.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그리하여 신자는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을 이룬다. 신비적 연합이란 개혁전통의 거룩성의 핵심을 이룬다.

프린스톤 신학자 찰스 핫지(Charles Hodge)는 성화교리를 요약한다. “우리는 양심이나 도덕적 동기의 힘 또는 훈련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화해되고 성신의 참여자가 되도록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에 의하여 거룩하게 되었다.”

10. 현실을 변화시키는 의로운 영성

영적 삶은 의로운 삶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경건하게 살면서 불의한 삶을 살 수 없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한 단계 더 높은 의(義)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율법적으로, 외형적으로 인정되는 의가 아닌 그 동기, 내면성을 감찰하시는 인격적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의를 말한다. 이 의는 은밀한 구제와 은밀한 기도와 은밀한 금식과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 형제를 나의 판단대로 않는 것과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는 것,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의 태도이다.

그것은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는 일이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복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바른 예배는 형제와 화목하고 형제와 바른 관계를 갖는 것이다. 형제와 송사를 진행하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진정한 영성은 율법적 차원으로 형제를 대하는 것을 넘어서서 원수까지 사랑하는 아가페의 정신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병든 자, 가난한 자, 헐벗은 자, 굶주린 자, 갇힌 자,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연민을 가지고 돌보는 자가 마로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자이다.(마 25:31-46)

칼빈은 고리대금업을 엄격히 반대했다. 그것은 이웃과 바른 관계를 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리대금업을 하는 자는 사회를 위하여 노동을 하는 것 없이 남에게 빌려 준 돈의 이윤으로 산다. 이들은 무위도식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직공이나 농민, 상인과는 달리 “하는 일 없이 편히 앉아서 다른 사람들의 노동으로부터 세를 받는다”

이윤을 위하여 돈을 빌려주는 것은 상호부조 사회에서 사람들을 연합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원리를 침해한다. 이웃을 향한 정의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 본질적이다.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말하고 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13:16)

11. 영원한 축복을 현실에서 실현하는 영성

개혁전통의 영성은 영원한 내세의 축복이 오늘 이세상에서 분분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현실에 대하여 도피적인 태도를 갖지 않는다. 이 현실은 칼빈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무대이다.

개혁전통은 종교적 영역과 세속적 영역을 이분으로 분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은 종교적 영역과 세속적 영역에 동일하게 미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 세속적 영역과는 초월해서 영원의 세계에서 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신자들의 변혁적 현실참여를 통하여 구체적인 현실과 역사내에서 파편적으로 실행된다. 그러므로 막스베버가 지적한 바와 같이 칼빈주의 실업가들은 세계 내적 금욕을 실천하고, 그의 사업성공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택의 구체적인 열매를 이세상에서 찾았다. 그리하여 칼빈주의 실업가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열심히 기업활동을 했고, 검약과 금욕을 통하여 소득을 축척함으로써 자본을 형성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가 발전되는 토대를 이룩했다.

12. 문화변혁의 영성

개혁교회의 영성은 문화변혁의 영성이다. 바울은 로마에서 기독자의 현실 변혁의 영성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세대를 본받지 말고 모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여기서 바울은 영적 예배를 몸의 산 제사(a living sacrifice)로서 설명하고 있다. 몸의 제사란 몸의 구별된과 성결된을 말한다. 몸의 제사란 이교의 영아살해에 의한 피의 제사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윤리적인 거룩성과 세속과의 성별을 말한다. 그것은 이세상에서 세속적인 문화와 사상에 물들지 않고, 심령이 세롭게 되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뜻이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음 문화변혁적인 삶을 통하여 비로서 가능하다.

문화변혁의 영성이란 내면 지향적인 영성과 외부지향적인 영성의 역동적인 통일이다. 이것은 3단계로 성숙한다. 첫째, 이신득의이다.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다. 이 칭의(justification)는 기독교 영성의 출발점이다. 둘째는 공동체 안에서의 인격적인 관계이다. 이것은 성화(sanctification)의 제 일단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하고 새롭게 된 내면적인 영성은 그 자체에 머물고 있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적인 영성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의 은사는 공동체를 위한 봉사와 헌신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영성은 외부로지향한다. 영성은 성례전을 통한 그리스도 지체로의 연합과 공적 기도와 성경연구와 교회의 예배참여, 각종 은사를 가지고 구역 권찰과 심방과 전도와 선교 등 공동체 훈련으로 형성된다. 셋째, 이 세상과 역사와 문화의 구원을 향하여 나아간다. 여기서 영성은 교회공동체를 넘어서 불신의 현실과 역사와 문화를 변혁시키는 실천적이고 역사 참여적 영성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십자가 신학의 영성이다. 이 영성은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역사의 고난과 갈등과 분열의 멍에를 자기의 십자가로 지고, 그것의 치유와 구원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역사 구속에 동참한다.

여기서 영성은 절제운동, 금욕운동, 사회질서 운동, 환경보전 운동, 가정중시운동, 평화운동, 경제정의 실천운동, 공동체 의식운동, 사랑의장기기증운동, 평화통일운동, 장애자, 아동, 빈민을 위한 각종 사회 복지 및 사회봉사 운동 등으로 구현된다.

이러한 문화변혁 영성은 내면적 영성에서 출발해서 밖으로 나아가나 다시 외면으로부터 다시 안으로 향하는 끊임없는 역동적 운동이다. 내면적인 영성의 힘을 공급받아야만 비로소 공동체의 봉사와 역사변혁의 힘은 고갈되지 않고 날로 새롭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끊임없는 내면화가 없이는 사회와 역사의 변혁이란 하나의 정치 내지 도덕 프로그램으로 변질되고 만다. 역사와 문화의 변혁이란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만남을 통한 내면적 충만을 통해서 비로소 새로운 힘을 공급받음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로서 문화변혁적 영성은 기독교적인 정체성을 잃지 않고 예언적인 영성으로서의 역사와 사회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혁시킨다.

B. 개혁주의 영성의 미래 : 도전

현대의 문학적 흐름 중 가장 크나큰 도전은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타종교와의 관계에서는 종교다원주의 종교 문화적으로는 뉴에이지 운동, 문화 사상적으로는 해체주의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란 하나님의 구원계시가 기독교뿐만 아니라 타종교에도 있으며 기독교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 아니라 타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주장하는 현대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유주의신학의 종교운동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무신론적 세속주의와는 달리 종교다원주의 입장에서 인간을 넘어선 초월적 차원을 인정하면서 동양적, 밀교적으로 해석하는 현대주의적 혼합주의 운동이다.

해체주의는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형태로서 전통적인 서구문화, 특히 진리를 인정하는 문화 전통을 부정하고 기독교의 전통적 신관과 교리를 부정하며, 교회의 예배를 거부하는 세속주의 운동이다.

따라서 종교다원주의는 범종교적 영성을 형성하고 있으며, 뉴에이지 운동은 혼합주의 영성을, 해체주의는 세속주의적 영성을 형성시키고 있다.

1. 종교다원주의와 범종교적 영성

종교다원주의는 후기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이다. 후기 현대와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전통교리의 어떤 부분을 부인하고 축소하면서 기독론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을 가지지만 이에 대하여 후기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교리에다 덧붙이면서 신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다원주의는 포용주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가 절대적이고, 유일하고, 결정적이고, 최종적이고, 규범적이고, 궁극적이거나 보편적이라는 전통적 주장을 거부한다. 재래의 자유주의 신학이 예수의 신성을 부인한데 반하여 후기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의 신성도 믿으면서 인간의 신성도 동시에 인정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예수는 다른 구세주 가운데 한 분으로 간주된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각 종교의 독특성을 부정하는 것이 없이 각 종교의 진리성을 인정하여 각 종교 신앙을 결합하고 있는 궁극자에 대한 비전을 제공함으로써 영적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 종교다원주의는 신학적 루비콘(theological Rubicon)을 건너는 세가지 다리에 관하여 말한다.

첫째는 역사적-문화적 다리(historical-cultural bridge), 즉 상대성(relativity)이다. 각 종교와 그 경전은 인간의 특별한 문화적 관점으로부터 나온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은 절대적이고 최종적 진리에 대한 권리주장을 포기해야 한다.

둘째는 신학적-신비적 다리(theological-mysterical bridge), 즉 신비(mystery)이다. 모든 종교에는 우리의 지각을 넘어서 있는 초월자에 대한 어떤 체험이 있다. 우리의 신학이란 신에 대한 우리의 상(像, our intellectual image)에 불과하다 신에 관한 우리의 상을 절대화 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우상숭배란 오로지 하나의 길, 하나의 규범, 하나의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셋째는 윤리적-실천적 다리(ethical-practical bridge), 즉 정의(justice)이다.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종교간의 대화의 필연성과 우선적인 목적을 요구한다. 세계적인 해방운동은 세계적인 종교간의 대화를 요구한다. 종교들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란 교리나 신비가 아니라 윤리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 복지를 증진하는데 대한 그들의 기여도이다. 그러므로 종교다원주의에 의하면 “기독교 또는 성경적 진리라 할지라도 종교적 진리에 대한 독점을 한다는 관념은 열광적이고 불합리한 종교적 광신주의이다.

이러한 다원주의 운동은 1961년 뉴델리의 제3차 WCC총회에서 인도 신학자 더바난단(Devanandan)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공시적으로 1970년 인도의 신학자 사마르타, 파니카, 토마스 등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논의되고 주장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신 중심적 모델’(theocentric model)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바르트 이래 주장된 그리스도 중심 신학의 종교 배타주의를 극복하고 라너(Karl Rahner)의 기독론적 보편주의까지 넘어서고 있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는 힉(John Hick)과 니터(Paul Knitter)에 의하여 서구 신학의 자유주의 종교 신학운동으로 체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힉은 기독교 내지 예수 그리스도가 종교적 헌신의 중심이라고 믿는 전통적 종교관에 대해 ‘코페르니쿠스적 혁명’(Copernican revolution)을 선언했다. 그는 모든 종교적 신념과 실천의 중심에는 ‘하나의 신적 실재’(one divine reality)가 있다고 본다. 힉은 모든 주요 종교들은 이 실재에 대해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제약된 인간의 반응이라는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했다. 니터는 예수의 선교와 인격은 본래 왕국 중심적 이거나 신 중심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초대교회에 이르러 교회의 메시지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기독론의 진화적 변형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는 ‘신중심적 기독론’(theocentric christology)을 주장하면서 기독론적 언어를 ‘사랑언어’(love language)로서 해석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신비가 예수에게만 제한되어 있지 않고 다른 자에게도 열려있다고 주장한다.

앞으로 이러한 종교다원주의가 더욱 더 기독교신학계와 교계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범 종교적 영성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종교다원주의의 범종교적 영성에 대하여 교회는 이를 비판하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다원성의 정신에서 타종교와 공존할 수 있는 열린 관용성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a. 신관-‘신 너머 신’(god above gods) : 신적 실재란 종교철학적 가설

종교다원주의는 모든 종교 배후에는 최후의 실재로서의 신, 다시 말하면 ‘신 너머 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모든 종교체험이 동일한 신적 실재를 가리키는가? 이에 대하여 종교사학자들은 모든 종교에 하나의 공통적 신적인 근거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종교사(宗敎史)학자들은 이 가설이 종교들 사이의 차이성을 간과하는 허구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러나 각 종교의 전통은 야훼나 알라나 브라만이나 니르바나나 모두 힉(J. Hick)이 주장하는 것처럼 종교적 실재에 대한 이차적 표현이라고 보지 않고 이들 각자가 모두 종교적 궁극자라고 하는 죄총적 존재론적 원리를 주장하고 있다. 이들 각 종교의 궁극자들은 서로간에 공통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서로 다르다.

b. 그리스도관 : 성경적 그리스도가 아닌 익명적 우주적 그리스도

종교다원주의 자들은 다른 종교에서도 그리스도가 있으며, 다른 종교도 구원의 길이라고 본다. 이들은 기독교와 타종교간의 연속성을 가능케 하는 접촉점으로서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힉(John Hick)은 예수를 “문자적으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신에 관해 전적으로 의식한 자”로 본다. 힉은 역사적 예수를 알려지지 아니한 나사렛 사람“으로 묘사하기에 이른다. 힉은 이러한 예수가 그리스도가 된 것을 진화론적인 모델로써 설명한다. 초대교회의 신비스러운 부활 체험의 충격과 주위 희랍, 로마 문화의 영향이 역사적 예수를 먼저 ‘메시야’로, 그 다음에는 은유적인 ‘신의 아들’로 최종에는 문자적으로 ‘신의 아들’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존재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고 본다. 니터(Paul Knitter)도 역시 역사적 예수에 관한 지식 가능성에 대해 힉의 회의론적 견해에는 찬성하지는 않으나 힉의 진화론적 모델에는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제시하는 기독교의 진화론적 설명은 전혀 성경적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와 부합하지 않는다. 예수에 대한 칭호가 인자, 메시야, 주, 신의 아들, 하나님으로 진술된 것은 진화가 아니라 발전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예수는 처음부터 ‘주’요 ‘하나님’이었다. ‘신의 아들’의 칭호는 A.D. 30년과 A.D.50년 사이의 예수에게 적용될 수 있다.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종말론적이고 메시야적인 사신으로 선포했다. 그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속에 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이 임박한 것을 알았다. 그의 수치스러운 십자가 죽음과 올리우심으로 해석되었던 부활은 특별한 종말론적 구속사건의 통일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기독론적 사고를 ‘선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했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하나님의 영원한 구속의 경륜이 그를 통하여 실현되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의 십자가 죽음이 인류의 죄를 대속한다는 메시야적 의식을 가졌다.

c. 성령관 : 삼위일체의 영이 아닌 혼합주의의 영성

종교다원주의는 여러 종교의 영과 기독교의 성령을 혼동하고 혼합한다. 틸리히의 성령론이 대표적이다. 틸리히에 의하면 신의 정신은 인간 정신 속에 거함으로써 인간 정신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인간 정신은 자기 초월로 나아가며 궁극적이며 무제약적인 것에 의하여 붙잡힌다. 신앙이란 영의 현재에 붙잡힌 상태이다. 틸리히의 성령론은 일반 종교철학적 성령론 속에 흡수되고 있다.

파니카도 성령은 기독교 신자들을 오늘날 그리스도에 대한 배타적인 체험에만 머물도록 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는 성령이 기독교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넘어 신비에 대한 세계적 체험에 참여하도록 한다고 피력한다.

2. 뉴에이지 운동과 혼합적 영성

다가오는 21세기에 가까이 살면서 전통적 기독교가 쇠퇴하고, 성경적언어가 그 힘을 상실하고, 종교적 다원주의가 밀물처럼 다가오는가운데 뉴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이 확산되고 있다. 뉴에이지 운동은 사구사상에 동양적 비교(秘敎)주의 사상을 혼합시키고 이에 점성까지 동원하는 신비적 혼합주의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의식의 변화를 통한 새 인간(New Man)과 새 세대(New Age)의 도래를 예견하고 있다. 이를 위해 뉴에이지 운동은 다양한 동양적 종교에서 유래한 비의(秘儀)적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특징화 된다.

첫째, 힌두교적 요가와 명상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이러한 비의적 방법을 통하여 인간 속에 있는 우주의에너지를 일깨워 우주 의식과 합일 된 해탈을 추구한다. 뉴에이지 운동은 요가와 명상을 통하여 인간 자아의 잠재적인 의식을 깨우쳐 니르바나(Nirvana)라는 열반(涅槃), 해탈(解脫)의 인신(人神)경지에 도달하고자 한다.

둘째, 심령술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열매와의 영적 교류에 의한 인간이 아닌 영들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 이 운동은 영매, 마녀, 마법사, 주술가들의 도움을 빌려 인간의 다른 면과 말하고 영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힘을 빌린다.

셋째, 자동기록(Automatic Writing)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고대의 경전들과 그들의 수호신의 가르침을 받는다. 이러한 경전이란 과거와 현재의 영에 의하여 전달되고기록되었다고 본다. 염파(念波)라는 텔레파시에 의하여 그 비의를 깨닫고자 한다. 뉴에이지 운동은 뉴에이지적인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상과 인간관과 구원관을 영지주의적이고 범신론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넷째, 신비한 초능력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명상의 초월상태에서 초능력을 행사한다. 땅, 물, 불, 바람을 통제할 수 있는 투모(Tumo)술, 특수한 호흡법에 의하여 공중의 자유에너지를 몸속으로 끌여들여 장거리를 고속으로 달리는 축지법, 한사람의 상념을 공중의 전자파를 통하여 상대바에게 알리는 텔레파시 등을 통하여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다섯째, 마인드 콘트롤(Mind Control)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자기 최면을 통하여 잠재된 의식을 일깨우고 자기 속에 있는 참된 자아, 곧 신의 본질을 지닌 자신을 발겨하고자 한다. 맥클레인(Shirley Maclaine Beatty)은 「빛 속의 춤」(Dancing in the Light)에서 높은 수준의 자아와 만난 경험을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침술기법을 통하여 자유로운 정신으로 들어가 그녀의 보다 높은 자아와 만나고 대화한다.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말한다. “천국은 당신 안에 있다. 자신을 알라 그러면 당신은 자유로와 질 것이다. …… 당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라 또한 당신이 우주라는 것을 알라 여기서 뉴에이지 운동은 인신화(人神化)를 추구한다.

여섯째, 바이오 피드백(bio-feedback)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미음의 조정에 의하여 생리의 변화를 마음대로 조절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운동은 영적 개발을 위하여 명상 및 요가 수행에 바이오 피드백을 활용한다. 바이오 피드백 이론에 의하면 뇌, 마음, 신체는 하나의 연속체이다. 인간의 마음, 즉 의지, 공포, 환희, 이미지, 추측, 기대는 두뇌의 작용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마음과 두뇌의 관계는 일반통행이 아니라 화학물질, 영양, 산소 등으로 두뇌의 작용이 바뀌면 사람의 마음도 바뀌에 된다는 것이다.

일곱째, 마약을 통한 치료와 사용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이러한 자의식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자아를 개방시키는 데 환각제(LSD)등 마약을 사용한다.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마약을 통한 황홀감과 신비감의 경험도 분명히 인간 내면의 정신세계에 대한 경험이요, 우주적 의식의 경험이요, 생명현상과의 일체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상 열거한 일곱가지의 비의(秘儀)적 방법들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결합되어 인간신(人間神)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식의 혁명을 위하여 사용되어 진다. 다가오는 21세기에는 이러한 뉴에이지 운동이 한층 더 큰 세력으로 나타나 혼합주의적 영성을 형성할 것이다.

이러한 뉴에이지 영성에 대한 기독교적 영성의 비판은 무엇인가? 뉴에이지 영성은 기독교와 힌두교, 불교, 신플라톤주의를 혼합한 영성이다. 이러한 혼합주의 영성의 정체를 밝히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에 입각한 기독교 영성을 형성해야 한다. 이러한 뉴에이지 사상이야 말로 현대판 영지주의 운동들이다.

3. 철학적 문학적 해체주의와 해체적 영성

해체적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텍스트 외에는 사실이 없다고 주장한다. 텍스트 밖에는 실재가 없다고 본다. 여기서 텍스트란 이야기(story, reci, narration) 등이다. 현실이란 텍스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재란 단지 텔레비젼, 광고 등의 이미지의 모사라고 말한다. 또 음악도 여러 노래들의 조각이나 단편에 불과하고 본다. 이처럼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하면 현실 내지 실재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텍스트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현대인은 컴퓨터의 가상현실(simulation)속에서 살고 있다고 본다.

둘째, 거대체계를 거부한다. 헤겔의 사변적 체계나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과 같은 이념이나 개념을 가지고 현실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거대체계는 무너졌다고 본다. 료타르(F. Lyotard)가 대표적이다. 데리다(J. Derrida)에 의하면 현실 내지 실재는 존재하지 않고 의미의 맥라만이 있다. 다만 텍스트만이 존재할 뿐이다. 표타르에 의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담론과 담론 사이에 연계와 연속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 사이에 단절이 있고 때때로 소통이 있을뿐이다. 다양한 담론들을 묶을 수 있는 거대 담론이란 없다고 본다.

미국의 포스트모던 철학자 리챠드 로티(Richard Rorty) 역시 철학이란 인류에게 유익을 주는 대화일 뿐이라고 본다. 이러한 입장은 문화상대주의로 귀결된다. 이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정신적 특징이기도 하다. 저자는 없다. 텍스트는 정합적이거나 전체적인 체계가 아니다. 글을 읽을 때 글을 쓴 저자에 대한 어떤 것을 알 필요가 없다. 텍스트 그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인용과 연속이다. 텍스트는 짜집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독자는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우연적인 사건들의 연속이다. 독자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해체를 시도한다. 체계의 통일성을 비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하면 보편적 체계와 보편적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보편적 의미란 없다. 서구의 여태까지의 이성 중심주의를 파괴한다.

다가오는 21세기에는 이러한 해체적 영성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해체적 경향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고한 말세의 징후에서 분명히 나타난다.(딤후 3:1-7)

C. 대안 : 개혁주의 세계관

1. 세계관의 필요성

(1) 세계관의 개념

개혁주의 영성을 위해 시급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개혁주의 영성의 기초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기초를 세우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영성의 기초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관은 사람의 가치관의 기준이 되며, 신앙의 체계가 된다. 세계관이란 세계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으로서 우리가 이세계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나름대로의 체계를 가지고 이해하도록 해주는 인식과 판단의 기본적인 틀을 가리킨다. 이원설 교수는 세계관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독일어의 Weltanschauung는 다른 말로 번역하기 어려운 낱말이다. 그것을 보는 견해에 따라 학자들은 세계관을 “삶의 정신적 설계”, “신앙체계”, “사회적 가치의 총체” 또는 “지적 풍토” 등으로 정의해 왔다. ……… 본래 Weltanschauung는 단순하게 세계, 지구, 세상 등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말이 아니다. 우주의 기원을 논하는 우주관과 일맥 상통하면서도 차이가 있다. 즉 보다 더 넓고 깊은 의미에서 한 인간 혹은 한 집단이 가지는 인생관, 가치관, 사회관, 자연관, 신관, 내세관 등을 종합한 신념 체계(belief system)라고 볼수 있다.

제임스 사이어(James W. Sire)는 “세계관이란 우리 세계의 기본적인 구성에 대해 우리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견지하는 바 일련의 전제들(혹은 가정들)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대답을 포함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1) 근본적인 실재는 무엇인가? (2) 인간이란 무엇인가? (3) 인가이 죽을 때 무슨일이 생기는가? (4) 도덕의 기초는 무엇인가? (5) 인류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들이다.

혹자는 이러한 질문들이 특수한 그리스도인의 과제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또한 너무 지적인 문제라고 따질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세계관이 바르게 서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놓고 제임스 사이어(James W. Sire)는 다음과 같이 세계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누구든지 충분한 지적 의식을 갖기 원하는 자는 타인의 세계관을 간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세계관도 알아야 한다고 확신한다. 즉 왜 자신이 그 세계관을 택했으며, 다름 많은 세계관 중에서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기독교인이 되는 순간 기독교 세계관을 믿음으로 맏아들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이 없이 바른 기독교 영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관은 우리의 신앙과 영성과 깊은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

세계관이 감당하는 기능에 대해서 찰스 클라프트(Charles Kraft)는 5가지 요소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어떻게 사물이 그런 상태에 있느냐를 설명하는 기능, 둘째, 한 사회의 제도, 가치, 목표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기능, 셋째, 기존 신념들을 그대로 유지하는 기능, 넷째, 새생각과 행동 양태를 흡수하는 기능, 다섯째, 새문화 변동에 적용하는 기능들이다.

따라서 세계관이 잘 정립될수록 또 그 체계가 성경적일수록 개혁주의 영성에 가갑다고 할수 있다.

(2) 세계관과 영성

이처럼 세계관은 우리의 전 삶을 포괄한다. 세계관에는 인식적 차원, 정서적 차원, 평가적 차원을 가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계관에 의해서 우리의 경험들을 해석하고, 또한 의미를 부여하며 그리고 분류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떤 누구도 우리의 신체적 눈이 없이는 세상을 볼 수 없듯이 누구도 자신의 문화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얻어진 세계관이라는 내면의 눈이 없이는 체계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온전한 개혁주의 영성은 성경적인 세계관을 정립함으로 시작할 수 있으며, 또한 교정될 수 있는 것이다. 영성과 세계관은 떨어질 수 없으며, 영성의 완성은 성경적 세계관의 완성에 부여된 경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영성의 바탕에는 나름대로의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세계관이야 말로 영성을 움직이는 기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힌두교의 영성에는 힌두교만의 세계관이 있다. 불교의 영성에는 불교의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영성에는 반드시 개혁주의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개혁주의 영성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그리고 간략한 세계관의 영역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2. 개혁주의 세계관의 영역

기본적으로 개혁주의 세계관은 다음의 영역을 모두 다루고 있다. 즉 성경은 인간의 삶을 다루는 ‘이세상’을 다룬다. 또한 성경은 천사와 사단의 ‘영적인 세계’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만의 영역이 있음을 인정한다. 또한 성경은 우리가 가지는 관계를 인간과 인간의, 인간과 하나님의 ‘인격적인 교제’로 제시하며 반면에 바다나 물, 동물들과 같은 ‘비인격적인 교제’도 인정한다. 그리고 성경은 그 능력에 있어 ‘자연적인 능력’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세계관은 이러한 영역을 기본적으로 인정하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1) 자아와 타자 (the Self and Others)

각 세계관은 나름대로의 자신과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틀을 제공한다. 즉 나와 나 이외의 것들을 어떠한 관계 속에서 이해하며 관계를 맺는가에 대한 틀을 세계관은 나름대로 가지고 있다. 그 틀을 크게 세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로, 자신과 주위 환경(즉 사회와 자연)과의 관계를 기본적으로 적대적 관계로 보는 입장이고, 두 번째는 자신과 주위환경을 중립적인 관계로 보는 것이고, 세 번째는 자신과 주위 환경과의 관계를 긍정적 관계로 보는 것이다.

지배의 관점에서 자신과 타자와의 관계를 분석해보면 이 또한 세가지의 입장을 보게된다. 즉 자신과 하모니의 관계에 있는 타자, 자신에게 예속 또는 복종하는 타자, 마지막으로 자신을 지배하는 타자들 이렇게 세가지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각 세계관은 자신과 자연 환경과의 관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해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서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인간은 자연과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조화의 관계로 이해했다. 반면에 서양에서는 자연은 인간의 지배의 대상이요, 누릴 대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해왔다. 이러한 세계관적 상이점은 문화의 방향성에 근본적 차이를 가져왔다. 조화의 관계로 이해한 문화는 자연의 개발보다는 자연에 대한 경외를 강조하여 자연 개발에 수동적 자세를 보여왔고, 반면에 서양에서는 자연을 개발하려는 적극성을 보여온 경향이 있다.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 가르침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을 보게된다. 먼저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기독교적 가르침은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지음 받은 존재라는 대전제가 있다. 즉 우리 모두는 창조자 하나님에 의한 피조물이기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며 또한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지음받은 존재요, 또한 우리의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하나님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목숨을 주신 그렇게 가치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바로 이 사실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인간의 가치를 말해주고 있다. 그럼으로 나와 너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이어야 됨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 오해도 성경적 가르침을 통하여 수정되어야 된다. 먼저 우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피조의 세계라는 것을 고려해야된다. 이 자연 세계는 하나님의 작품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 하나님의 피조의 세계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겨 주신 것이다(창 1장).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은 인간과 자연의 가르침을 지배와 피지배와 관계로보다는 관리와 보존의 책임을 맡은 자로 본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화해의 사역은 죄로 생겨난 모든 부조화의 관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되어 조화의 관계로 회복되어질 것을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다(롬 5:11, 고후 5:11-21).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 볼 때 기독교는 조화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2) 사고와 사물의 분류(Classification of Ideas and Things).

각 세계관은 사물을 분류하는 나름대로의 분류의 틀을 가지고 있다. 한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분류의 틀에 따라서 자신의 경험들을 정리하고 분류한다. 분류의 예로는 실체와 비실체의 영역으로 나누는 것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보면 어떤 세계관에서는 귀신, 천사, 점성술의 힘, 꿈의 세계 등을 비실체의 영역으로 분류된다. 반면에 다른 세계관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을 실체로 간주한다. 또다른 예를 신의 영역, 인간 그리고 다른 동물들의 분류에서 볼 수 있다. 기독교의 세계관에서는 창조자 하나님과 피조물의 세계는 엄격한 구분이 있다. 또한 인간과 다른 동물들과도 엄격한 차이를 강조한다. 그러나 힌두교의 세계관에서는 신들과 인간과 동물들이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으며 상호 교류적임을 볼 수 있다. 즉 신들과 인간 그리고 동물들 사이에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신들이 인간도 될 수 있으며, 인간이 또한 동물이 되거나, 신으로 변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희랍 신화를 보면 인간과 식물 사이에도 상호 연관성이 있어 상호 교류적임을 보게된다.

또 다른 분류의 예로는 경험적(natural) 범주와 초자연적(supernatural) 범주, 즉 과학의 영역과 종교의 영역으로 나누는 것이다. 서양의 세계관에 있어서의 분류적 성향은 경험적 범주와 초자연적 영역 또는 과학의 영역과 종교의 영역으로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에 정령신앙이 강한 세계관에 있어서는 이 두 영역의 구분이 모호하다.

(3) 인과관계(Causality)

각각의 세계관은 자신과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나름대로의 독특한 인과론 즉 원인에 대한 규명의 체계가 있다. 예를 들어서 인도 종교의 영향권에 있는 문화들에서 볼 수 있는 인과응보적 삶의 이해는 인과론의 대표적 예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의 삶은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도덕적 인과론인 인과응보의 법칙에 의해서 결정되며 어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모든 삶과 사건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원인이 있다는 믿음인 것이다. 반면에 정령 신앙이 깊게 뿌리 내린 사회에서는 인간의 길흉의 원인을 이 세상에 떠도는 영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과학주의도 인과론인 바 이에 따르면 이 우주는 닫혀진 체계로써 그 스스로의 과학적 법칙에 따라서만 지배되어진다고 믿는 것이다. 즉 과학적 인과론만을 유일한 설명의 체계로 받아들이는 축소주의적 세계관이다.

인과론은 크게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인격적 인과론이고 다른 하나는 비인격적 인과론이다. 인격적 인과론은 이 우주나 이 우주를 주관하는 것을 살아있는 생명체 즉 존재로 보는 시각이며 반면에 비인격적(기계적) 인과론은 이 우주를 궁극적으로 주관하고 있는 것을 생명체가 아닌 기계적 법칙이나 원리로 이해하는 세계관이다.

(4) 공간과 시간(Time and Space)

모든 사건은 반드시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난다. 즉 시간과 공간은 사건이 일어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필수적 요소들이다. 그럼으로 세계관의 인과론은 그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시간관과 공간에 대한 이해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게된다. 어떤 세계관은 좀 더 과거 지향적인데 반하여, 다른 세계관은 현재 지향적 이거나 미래지향적이기도 한다.

시간에 대한 대표적인 이해로는 시간은 일정한 간격으로 앞을 향하여 진행 되어진다는 직선적 시간 개념, 시간이 앞을 향하여 진행되어진다고 보면서도 역사에서의 특별한 사건을 중요시 여기는 사건적 시간 개념, 시간은 끊임없이 순화 반복 되어진다고 보는 순환적 시간 개념 등이 있다.

공간에 대한 이해도 다양하다. 예를 들어서 땅 자체를 자신의 생명과 동일시 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땅을 떠나게 되는 것을 곧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일정한 장소를 강조하기 보다는 일정한 시간을 강조하는 신앙이다. 그럼으로 힌두교나 이슬람교와 달리 자신의 종교에서 성스러운 곳으로 여기는 곳을 방문하는 성지순례를 강조하기 보다는, 시간의 개념들이 더 강조되고 있다. 성경은 역사의 시작을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성경은 역사의 과정에서의 역사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역사를 진행하셨는가를 신구약은 계시하고 있다. 드디어 역사의 전환점으로써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수난과 부활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고,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하여 역사가 정리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날의 도래를 고대해 왔다.

이러한 내용들을 좀 더 성경전체적인 안목에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로 만물이 존재하기 전부터 살아계셨으며, 확고한 목적에 따라 이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은 사랑과 능력으로 이 세상을 유지, 섭리, 운행, 주관하신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고, 의지하고, 기도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 되었기 때문에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분된다. 인간의 모든 것 - 사회, 예술, 정치, 가정 등 - 은 하나님을 반영하게끔 되어있다. 타락 이후 이것이 미약해 졌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며,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전 생활영역은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된다.

셋째, 죽음은 하나님을 반역한 대가이다. 하나님을 영영거절한 자는 죽음을 통해 영원한 단절과 고통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을 모신자는 인간이 원래 창조된 원형 이상의 즐거움 가운데 영원히 있게 된다.

넷째,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시므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계명을 베푸셨고 더 나아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된다. 이런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대속의 사랑은 우리가 남을 사랑하고 옳게 행동할 수 있는 모범인 동시에 원천이 된다.

다섯째, 인류에게 시작이 있듯이 종말이 있다. 종말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지만 이것은 모든 것의 멸절을 뜻하기 보다는 새로운 차원으로 완성 및 회복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세계관을 바탕에서 개혁주의 세계관은 출발해야 한다. 특히 이러한 세계관을 기초한 삶 속에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경건이 함께 해야 한다. 이것이 개혁주의 영성의 모습이다. 만약 여기에 경건이 빠진다면 개혁주의 영성은 언제고 그 생명력을 잃고 다시 신비주의 영성이나 아니면 세속적 영성으로 변질되어 가고 심지어는 타종교의 영성에 흡수되어 질 것이다.

Ⅳ 영성개발의 방법

A. 기도를 통해서 영성개발을 시작해야 한다.

인도의 선교사로 기도의 사도란 별명을 가진 존 하이드가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라고 하면서 기도의 각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사실 역사를 보면 모든 영적 부흥은 언제나 몇 주, 혹은 몇 달 동안의 뜨거운 기도 후에 일어났는데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국의 대각성 운동이나 웨일스의 부흥이나 인도네시아나 한국의 부흥을 보면 다 기도에서 시작하여 불이 붙었다. 기도의 골방은 영성 개발의 불쏘시개이다. 따라서 기도는 모든 위대한 일을 이루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기도에는 언제나 특별한 능력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성 회복의 시작은 기도다. 그래서 영성신학은 기도신학에서 출발한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교회는 은혜의 수단인 영성 훈련을 탐구하는 환경을 제공해 준다. 예를 들면 예배, 기도, 성경 봉독 등은 교회를 축제의 공동체로 인식하는 데서 나온다. 그러나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교회의 훈련에 숙달해지는 것이 영성은 아니다. 영성훈련은 다양성과 넓은 범위를 가진다. 또 영적 도움들은 제자훈련을 통해서 습득된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를 위해 그 원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실천에 더 많은 수고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더욱 자라간다. 기도는 믿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갓난아이에게 우는 소리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없듯이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기도도 그렇다. 기도는 아이의 울음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기도의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기도이다. 인간관계를 보면 사랑과 신뢰와 헌신을 통해서 깊어지듯이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만들어 준다. 따라서 믿음의 성장은 기도의 성장이다.

1. 왜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만큼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영적 체험도 없지만 그러면서도 기도만큼 잘못 인식된 것도 없다. 기도는 단순히 예배의 한 순서나 활동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통이며 천국의 보화들을 이 땅의 우리가 받는 천국의 열쇠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기도하는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며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응아”하고 소리내어 우는 일이다. 만약 아이가 울지 않으면 의사는 아기의 볼기짝을 때려서라도 울게 한다. 태어난 아기가 울지 않으면 그것은 사산된 아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음의 생황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믿고 크리스천이 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하나님께 우는 기도이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 그것은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배우지 않고는 기도를 한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고백과 함께 감사의 기도를 한다.

처음에 아기는 한 살이 될 때까지는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냥 울기만 하면된다. 그러면 엄마는 처음에는 아기가 왜 우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지만 조금씩 그 울음의 이유를 알게 된다.

왜 우리는 기도하는가? 성 어거스틴은 가단하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그 사랑의 표현이 바로 기도라고 했다. 마치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면 대화를 하고, 가까 우면 가까울수록 그 대화는 더욱 깊어지듯 기도도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비례하여 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기도를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의 마을은 우리에 대한 상처로 인해 벌어져 있다. 그 상처는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거실과 주방가 작업장으로 심지어 그의 침실로 초대하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는 오직 기도 외에는 없기 때문에 기도는 믿는 자들에게는 절대적이며 필수적이다.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가 기도라면 그 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목이 곧고, 마음이 굳은 것을 아시고 그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한 통로를 예비하여 제공하고 계신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죄로인해 하나님 앞에서 추방당한 채 세상 밖에서 방황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어두움의 권세와 사탄을 물리치시고, 승리의 부활을 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다. 따라서 기도를 잘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잘하는 것이다. 그래서 포스터는 사랑을 잘하는 사람이 기도도 잘한다고 했다.

2. 그러면 왜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가?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첫째로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요15:4).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서도록 해준다. 하나님과의 영적 대화는 바로 기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기본적인 태도와 관계를 말해 준다. 세상에서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주 만나고 많은 대화를 나누듯이 기도는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의 표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정도에 따라 우리는 기도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면 할수록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마침내 내 맘속에 거하시는 주님을 체험한다.

물론 초보적 기도는 단순히 달라는 청원기도에서 시작하여 청원기도로 끝나지만 기도할 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되며 기도를 통해 나와 내 주변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기도는 항상 청원의 기도에서 멋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왜 하국에는 거지 신자가 그렇게 많으냐고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가 사회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갖기 위해서 대화법이 필요하듯이 신앙생활을 하려는 우리에게는 기도의 신학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기도는 영성훈련의 시작이며 그 과정이다.

둘째로 사탄,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믿는 자들을 유혹하려고 하기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눅22:40). 그러면 사탄은 어떤 존재인가? 사탄에 관한 기록은 이사야서와 에스겔서에 은유적으로 표헌한 것 외에는 별로 없다는 것이 아쉽다. 이사야서 14장은 바벨론 왕에게 한 예언으로 되어있고, 에스겔서 28장에는 두로 왕에게 한 예언으로 되어있으나 그 기록은 루시퍼(사탄에 대한 라틴어의 표현)에 대한 기록임에 틀림없다. 사탄은 세상 창조 이전에 천사장인 루시퍼를 통해(사14:12, 겔28:12) 다른 많은 천사들을 규합하여(계12:4, 7-12) 하나님께 반역하여 하나님과 같아져서 세상을 지배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사탄이 된 루시퍼는 실패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반역한 천사장인 루시퍼를 세상으로 쫓아내심으로 심판하였지만 사탄은 포기하지 않고 그의 작전을 바꾸어 이번에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도록 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게 했던 것이다. 아담이 실낙원했으니 어떻게 보면 사탄은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에덴동산이 아닌 하늘에 있는 중간 지대인 낙원과 영원히 거할 천국을 창조하신 것이다. 사탄의 유혹 작전은 그가 하늘에서 떨어진 후에도 인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계속해서 사람들을 유혹하여 666이라는 인을 찍어 그의 백성들을 증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에서도 볼 수 있는 대로 사탄은 아기 예수님이 탄생할 때 헤롯 왕을 통해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고, 그것이 실패하지 이번에는 헤롯이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들을 죽이도록 한 것이다.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사탄의 작전은 아기 예수님이 이집트로 피난가지 않을 수 없도록 헤롯을 통해 핍박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의 열두 살 이후의 사건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추리하고 상상할 뿐이다. 아마도 이것은 예수임이 메시아 사역을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인간적으로)을 주시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많은 책들이 있지만 역사적 근거가 없는 상상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삼십 세쯤 되어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려고 했을 때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했는데 그것은 그의 메시아 되심을 의심케 하여 공생애를 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마4:1~11)이라고 반복해서 시험한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승리하자 사탄은 예수님을 떠났다고 했다(마4:11). 그러나 이것은 사탄이 완전히 굴복한 것은 아니다. 다른 기회를 노리기 위한 작전상 휴전이었을 뿐이다.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전술은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죽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룟 유다를 통해 그를 30세겔에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팔게 하여 그때의 가장 무서운 사형 제도인 십자가형에 처하게 한 것이다. 사실 이것은 외면적으로 보면 사탄의 완전한 승리였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죽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탄은 인간보다는 지혜롭지만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십자를 통하여 예수님의 구원 계획을 완성케 한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외치셨다. 사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버리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음에 “다 이루었다”(요19:30)하시며 주님은 승리를 선포한 것이다. 세상 말로 말하면 역적승이었다. 그러나 그 선포는 지상에 있는 사람들과 만물에게 한 것이기 때문에 베드로전서3장19절에 보면 지옥에 가셔서 이미 죽은 자들에게 또 한 번 그의 승리를 재확한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20잘17절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즉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붙잡으려고 했을 때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다시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그의 육체는 무덤에 있었고 그의 영혼은 지옥에 가셔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구속 사역을 다 성취하시고 승리한 것을 선포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영어로 된 사도신경에는 “He descended into Hell"(그가 지옥에 내려가셔서)이라는 말이 나온다.

물론 우리말에서 그것을 생략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그의 군대인 악령과 귀신들을 통해서 지금도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 믿는 자들을 유혹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삼대 무기(믿음, 말씀, 기도)의 하나님 기도라는 무기를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적 무기들을 사용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기도를 통해 우리의 내적 변화가 일어나고, 하나님께로 향하여 가깝게 나아가고, 마침내 사회에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역을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셋째로 기도는 우리의 비전을 확장시켜 주고 자아를 허무는 과정이기에 우리는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가면을 벗게 되고, 자신을 넘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도와주신다. 솔직히 직장에서의 박복되는 일은 때때로 따분하게 여겨지지만 기도를 통해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가를 깨닫게 해주신다. 현대는 시장경제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익과 생산성을 따지기 때문에 노동이란 것이 때로는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기도는 우리가 하는 날마다의 노동을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로 승화시켜 준다.

양파를 보면 껍질 속에 또 껍질이 계속해서 있는 것을 본다. 사람도 양파와 같아서 수많은 가면과 껍질 속에 있기 때문에 진정한 자아를 보기가 어렵지만, 깊은 기도는 내며의 자아를 보게 하고 그것을 하나씩 벗겨준다. 문제는 그것이 보혈과 권능으로만 되기 때문에 형식적 기도나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기도는 아무런 역사도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과 자주 만나기를 원하지만 우리의 가면으로 인해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한다. 그러나 기도는 그 가면을 벗겨주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해준다. 어떻게 보면 기도는 결환관계와 같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와 일상에서도 기쁨과 행복이 있지만 가장 큰 기쁨은 성적으로 서로 하나가 될 때이다. 한 몸이 되는 순간 몸과 영으로 최고의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성교도 육적으로만 가질 때에는 피상적인 잠깐 동안의 쾌락에서 끝나지만 마음과 몸으로 가지는 성적 교제는 사랑하는 아기를 잉태하게 해준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한 기도처럼 사랑하는 주님과의 일상적 대화에서도 기쁨과 행복이 있지만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은 그와 깊이 영적으로 하나가 될 때, 주님과 연합을 통해 맛볼 수 있다.

넷째로 성령의 은사를 받아 우리가 능력있게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막9:29, 약5:16~18, 요15:7). 사실 영적 성자이란 기도의 성장과 뗄 수 없을 정도로 기도 없이는 절대로 영적 성장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일은 우리 힘으로는 전혀 할 수 없다.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직분을 받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뜨겁고 열심히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차지도 뜨것지도 않은 미지근한 성도들이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내 힘으로 주의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간단한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

왜 우리가 능력을 받지 못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손에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 즉 인간의 지식과 기술, 돈과 세상에서의 계급장, 우리의 교만과 허세를 다 버리고 빈손이 될 때 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을 주신다. 아이들을 보면 장난감을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손에서 놓지를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다른 더 좋은 것을 가지려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고 빈손이 될 때 새것을 소유할 수 있다.

다섯째로 기도하라고 주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마6:6, 대상16:11, 빌4:6).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셔서 사랑을 나누고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때에 따라 주시고 싶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실 때 가장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는 많은 일을 해야 하나님이 좋아하실 것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다. 능력 많은 목회자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안식의 원리를 잊고 과로하기 때문이고, 기도할 때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 이상으로 일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부모가 되었을 때 우리는 자녀들이 자기 힘에 부치는 무거운 것을 드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야단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시다. 때로는 “야, 잘 시간 지났어. 푹 자고 내일 다시 시작해” 하고 말씀하신다. “아니야, 내일 시험이 있어서 오늘 밤을 새워야 해”하고 말하면 부모들은 걱정하신다. 인생은 평생 배우는 것인데 한꺼번에 왕창 공부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기도하는 것은 좀 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시간에 우리의 스트레스는 해소되고, 피곤에 지친 우리 영혼은 안식을 누리며 모든 것이 회복된다.

우리는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할 때도 있다. 그것은 인간적인 생각이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과 같아서 바쁠수록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 시간 있을 때 기도하려는 생각은 기도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바빠도 숨은 쉬어야 하고, 오히려 바삐 뛸 때는 더 자주 그리고 힘차게 호흡해야 하듯이 기도도 그런 것이다. 기도는 우리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도는 우리의 시간을 벌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자동차를 몰고 어떤 목적지를 가다가 길을 잃고 빙빙 돌 때가 있었을 껏이다. 지금은 GPS(Global Positioning System)를 통해서 모르는 길도 잘 간다. 그래서 흔히 그런 말을 한다. 우리가 성공하려면 세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어려서는 어머니의 말을, 결혼 후에는 아내의 말을, 운전할 때는 네비게이션에서 나오는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기도는 네비게이션과 같이 우리의 목적지를 자세히 알려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우리의 지금 있는 위치가 어디이며 목적지에 가려면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의 초고 목적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서 우리와 대화하시고 싶어 하시고, 동행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여섯째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출33:12, 용42:4).

하나님의 뜻은 특별계시인 성경에 가장 잘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기도 없이 성경을 읽으면 그 계시가 살아서 움직이지 않는다. 물론 성경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것이 살아서 내게 다가오는 레마가 되려면 기도를 통해 영안이 열리고, 영의 귀가 열려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자연과 역사의 일반계시를 통해서도 보여주지만, 그것은 영안이 열린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이다.

위에서도 말한대로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서 가장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기도를 통해 그때마다 필요한 말씀 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기도는 마치 스마트폰과 같이 손에서 놓아서는 안된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다.

일곱째로 영혼의 소성(새롭게 살림:시119:25, 88)과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시119:5, 10).

이 세상에는 우리의 영혼을 피곤케 하는 일들이 너무도 많다. 육체적으로 지나치게 많은 짐을 져서 영혼을 피곤케도 하지만 SNS로 인해 마음을 상하는 경우도 많다. 이때는 영혼에 안식을 주어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그것은 기도밖에 없다.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의 하나는 안식이라는 축복이다. 이 안식을 주기 위해 주일 예배를 드리게 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게 하신다.

또 순종하는 삶도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해야 순종인지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라고 하는 지남철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을 잡는 것이다.

여덟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민14:13~16, 단9:17, 19).

솔직히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성경에 보면(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주님의 일을 할 때만 된다는 관념을 깨뜨려 준다. 심지어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비록 먹고 마시는 것이라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먹게 된 것을 감사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 믿고 은혜 받으면 다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켤코 성경적이지 않다. 문제는 성속의 개념이 잘못된 것이다. 사실은 모든 것이 다 거룩하다.

아홉째로 우리의 산만한 생각을 정리하고 영적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세상에서 살다 보면 언제나 머리가 맑은 것은 아니다. 주변의 수많은 일들과 염려로 인해 우리의 머리는 마치 낙서한 칠파처럼 뒤숭숭할 때가 많다. 그러나 기도를 하면 이 세속 세상에서 영적 세계로 들어가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고 맑게 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열째로 우리가 근본적으로 변화되기 위해서 기도한다. 인간의 근본적 변화란 교육을 가지고도 안 되고, 수양을 닦아서도 안 된다. 근본적인 변화는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따라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인간을 창조할 때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ㅇ시고, 그의 입김을 불어넣어 아담을 창조한 것처럼 지금도 오직 하나님만이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들을 재창조하실 수 있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 우리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열한 번째로 기도는 세상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기도이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는 이렇게 말했다.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백 명의 설교자를 내게 주시면 지옥의 문을 닫고 천국의 문을 열 것이다.”

솔직히 우리의 손은 때묻은 손이기 때문에 이 손으로는 절대로 영적 역사를 이룰 수 없다. 오직 인간을 창조하셨던 하나님의 그 능력의 손만이 큰 역사를 이룰 수가 있는데 그 것이 바로 기도이다.

3. 기도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기도란 “하나님과의 영적 대화”이다. 결코 사람들을 감동시키거나 교훈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란 말씀이다. 우리는 가끔 이 간단한 사실을 잊고 있다.

기도는 어떤 면에서 성도들의 “영적 호흡”이다. 그러므로 영적 호흡인 기도가 중지되는 순간 우리는 영적으로 병든 것이고, 죽어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도란 무엇인가? 어거스틴은 ‘참된 기도란 사랑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즉 기도=사랑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기도를 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식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슬퍼하시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한 하늘의 집으로 인도되어 거기서 기쁨과 행복과 평안을 누리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의 일로 분주하고 바빠할 때 우리는 기도하기를 쉬게되는데 그때 우리는 자기가 하는 일의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슬퍼하시고 우리가 세상일을 할 때에도 그의 집으로 가서 함께 교제하며 대화하기를 원한다. 그것이 바로 기도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에 빠쁘다고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는 일의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바쁠수록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어린애가 엄마의 품에 안겨서 재롱도 부리고 투정하는 것과 같은 사랑의 표현이다.

스펄전은 기도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기도는 길을 찾는 연락용 비둘기돠 같아서 천국에 도달하는 데 실패하는 법이 없다”. 왜 그런가? 스펄전는 이렇게 대답한다. 참된 기도는 천국에서 왔기에 그것들은 다만 고향을 찾아갈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말할 때 삼위일체로 믿고 고백한다. 이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교리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진리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기도도도 삼위일체적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기도는 성자이신 그리스도께 드리는 면이 있고, 성부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면이 있고, 성령 하나님께 드리는 면이 있다. 그러므로 기도에는 세 면으로 향한 것이어야 완전한 기도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리차드 포스터가 그의 책 “기도”에서 강조하는 점이다.

그러면 이 삼위일체적 기조는 구체적으로 어떤 기도인가? 솔직히 지금까지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만 기도해 왔다. 따라서 기도가 풍성치 않을 뿐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축소시켜 왔다. 삼위일체적 기도는 놀라운 영적 풍성함을 가져온다. 그러면 이 삼위일체적 기도란 어떤 것인가?

첫째로 “안으로 향하는 움직임”이 있는데 그것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서 랍비와 구주로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사역에 부응하는 기도이다.

둘째로 “위로 향한 움직임”인데 그것은 성부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가운데 통치하시는 왕이시오 능력 주시는 자로서의 하나님 아버지의 사역에 관한 기도이다.

셋째는 “밖으로 향하는 움직임”인데 그것은 성령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기도는 언제나 안으로 향하는 움직임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께로 향할 수가 없다. 기도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에 먼저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안으로 향하는 움직임 없이는 교회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형식일 뿐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곧 길”(요16:6)이라 하시면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기도에는 순서가있다. 먼저 우리의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가끔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것은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교만과 무지 때문이다. 기도한다는 것은 “오직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고백이다. 따라서 기도할 때 마다 이 내적 변화가 일어나야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우리가 하고 있는 단순한 기도는 초점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 그러나 참 기도는 나는 무지하고 무능하며 있는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비우는데서 시작되어야 하나님께서 준비한 풍성한 은혜를 풍성하게 받을 수 있다.

우리가 드리는 단순한 기도는 그 안에 순수한 면도 있으나 자기중심적인 것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초신자 때에는 용서되고 이해되지만 평생 그런 기도만으로는 큰일을 할 수도없고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기에는 부족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때 단수한 기도인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가르쳐 주신 점이다. 그러나 만약 이런 단순한 기도만 한다면 우리는 평생 자기 중심적인 기도만 하다가 만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먼적 자기가 있는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단순한 기도이다. 그러나 기도이 시작은 단순한 기도이지만 여기서 멎어서는 안 되며 안으로 향하는 내면적 기도, 즉 주님께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 자신 속에 있는 수많은 죄악들과 더러운 모든 것들을 다 십자가 앞에서 장사지내야 한다. 그러려면 영적인 탐욕까지 다 버리고 마음을 깨끗이 씻어야 하는데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적 은혜와 그의 귀하신 보혈 없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만한 자격을 가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기도하는 법을 배워햐 한다. 아이가 어려서는 그냥 울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지만 커가면서 계속 밥까지 먹여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처음 기도할 때 우리는 단순한 기도를 드렸다. 그때는 당연히 자신이 중신이고, 주세이지만 안으로 향하는 성자 예수님께 기도드리면서 그동안 변두리에 놓았던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단순한 기도에서는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시42:9)라고 기도하기도 하고, 하나님과 다투기도 한다.

그러나 기도에는 공식적인 단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 제시하는 기도의 신학은 기도의 높이와 깊이, 넓이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므로 기도의 신학이 하나의 공식이 될 수는 없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관계 정립이요 사랑이기 때문에 때로는 순서가 없을 수도 있고, 때로는 단순한 기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일 수도 있다.

안으로 향하는 기도는 성찰의 기도이다. 마치 우리가 더러워진 몸을 물에 담그로 욕탕에서 나온 후에 때로 인해 더러워진 물을 보고 놀라듯 안으로 향하는 성자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는 성찰의 기도이며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게 해주는 기도이다. 바울이 자신을 향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고 고백한 그 체험을 우리도 경험케 되는 것이다.

안으로 향하는 기도는 어거스틴에게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안으로 향하는 기도는 자신의 죄 되 모습을 보게 되고 이때 우리는 눈물의 기도를 드리게 된다(욥16:20). 이때의 눈물은 닛사의 그레고리가 말했듯이 “영혼의 상처에서 나오는 피”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믿고 나서 회개할 때 이런 눈물의 기도를 체험해 보지 못했다면 그는 아직도 완전한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마음을 찌르는 회개가 있을 때, 마음을 찢는 겟세마네의 기도를 하게 된다. 겟세마네에서의 주님의 기도(막14:36)는 무엇인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기도, 즉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소”라는 기도이다. 따라서 안으로 향하는 성자에게 드리는 기도는 “자아의 포기”에서 “복종의 기도”(아버지의 뜻대로)로 향한다.

그러면 기도의 한계는 무엇인가?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우리가 안으로 향하는 성자께 드리는 기도를 드릴 때 세 가지 영역으로 우리를 변하시켜 간다고 했다. 첫째는 전통적 영역으로서 금식, 예배, 찬양 등이며 둘째는 저항, 불순종, 회개, 굴복, 믿음, 순종으로 향하게 되는 영역이며 셋째는 매일같이 당하는 좌절과 시련, 유혹을 통해 우리 안에 키워주는 인내심이라고 했다. 그는 이 세사기를 “황금의 삼각형”리아고 불렀다.

이 변화를 위한 훈련으로 이그나티우스는 “영적 훈련”이 라는 책에서 네 가지 훈련을 언급했다. 첫째는 우리의 죄에 초점을 맞추는 훈련이고, 둘째는 그리스도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훈련이고, 셋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초점을 맞추는 훈련이고, 넷쩨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초점을 맞추는 훈련이라고 했다. 이 훈련은 그리스도를 닮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 훈련은 성령의 특별한 은혜와 은사 없이는 불가능하다.

솔직히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잔소리하는 친구들에게 미소를 짓기 어렵고 우리 안에 있는 이기심을 정복하지 못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완전히 빠져서 자신을 포기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안을 향하는 움직임을 위해서는 절대 고독이 필요하다. 이 고독은 자신이 토기자이이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진흙임을 깨닫게 해준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쓸데없는 일에 너무 분주하고, 특히 스마트폰에게 온전히 사로잡혀 포로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절대고독이 필요하다. 우리는 세상에서 고독을 피하기 위해 취미생활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심지어 결혼도 하지만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절대고독의 체험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러나 절대고독 없이 우리는 참 자유인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소리를 적게 들으면 적게 들을수록 절대고독의 단계에 이르기가 쉬워진다. 그러나 절대고독은 자기 자신에게 대해서도 죽어야 하는 단계이다.

이용규 선교사는 “내려놓음”이라는 책에서 세상에서는 내려놓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유혹하지만 그러나 내려놓을 때에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하면서 자신의 예를 들어 간증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에서 특히 강조한 말이다. 집착을 버려야 해탈한다고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냥 내려놓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의 것들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나를 비우고 그리스도로 채우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용규 선교사도 그런 뜻에서 말한 것으로 본다.

포스터 교수는 두 번째로 위를 향한 성부께 드리는 기도를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 기도는 찬양에서 시작된다. 찬양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고 존귀하게 여기려고 할 때 일어나는 열망이다. 이 찬양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에 초점을 맞춘다. 찬양은 곡조있는 기도이기 때문에 이 찬양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한다. 많은 성도들은 찬양을 통해 가슴 설레는 체험들을 가진다.

우리가 찬양의 기도를 드릴 때 거기에는 감사와 찬송이 함께 일어난다. 구약시대를 보면 왕정 시대, 특히 다윗의 시대를 보면 제사장들을 택하여 언약궤 앞에서 찬양만 하는 사명만을 맡겼다(대상16:4~36). 어떻게 보면 찬양이 감사보다 더 높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찬양할 때에는 감사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과 은혜와 구속하심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찬양을 방해하는 것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 첫째는 부주의 함이요 둘째는 다른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셋째는 탐욕이요 넷째는 교만이다. 남보다 더 은혜를 받으면 이 영적 교만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방언하는 사람들을 보면 방언을 못하는 사람들을 신앙이 없다고 본다. 그런데 이 찬양의 기도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주리는 것이다.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잃은 것은 안식의 함된 뜻이다. 안시은 단순히 휴식하는 것이 아니다. 이 안식에는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의 마음을 자제하는 것이 들어 있다. 솔직히 우리는 소유하려는 소유욕 때문에 노예처럼 물질에 매여 산다. 따라서 안식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자신의 손안에 움켜쥐려는 것에서 해방되어야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은 체념이나 게으름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물러나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도록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힌두교 사상이다. 힌두교인들은 운명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냥 수동적으로 순응한다. 그런데 소위 기독교인 가운데도 그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것을 믿고 의지한다. 따라서 어떤면에서 우리가 기도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기도하는 것이다.

이 두 번의 위를 향해 움직이는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 보좌 앞에서 성령께서 우리가 기도할 때 가지는 탄식과 한숨을 해석해 주신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우리 기도를 중재하신다. 또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우리 기도를 가지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대화하시는 것이다.

우리를 위한 안식의 기도는 세 가지 단계로 할 수 있다고 포스터 교수는 말한다. 첫째는 고독을 통한 변화이며, 둘째는 하던 일을 멈추는 것이다. 이것은 상호의존적인 것을 멈추는 것을 말한다. 이때에 우리는 에벤에셀(삼상7:12)의 하나님과 만난다. 셋째는 날마다 돌이키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달았다는 뜻이요 그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삶을 산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물론 돌이키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해 진다. 따라서 회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다. 이 회개의 순간 우리는 마음속에 참된 기쁨을 체험한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눈물의 은사”라고 불렀다.

지금 카톨릭이나 성공회에서는 기도할 때 기도의 책을 사용하는데 이것을 개신교에서는 너무 형식적이라고 해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지만 이 방법이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점도 있다. 첫째는 기도의 내용이 분명하고 중언부언하지 않는다는 것, 둘째는 성도들이 서로 교통하고 연합할 수 있다는 것, 셋째는 남의 시선을 집중키시거나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는 유혹을 피할 수 있다는 것, 넷째는 습관적으로 하는 기도를 피할 수 있게 하고, 다섯째는 기도의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점 등이다.

가장 완전한 기도의 하나는 성찬식을 자주 가짐으로써 귀로만 듣는 말씀인 설교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말씀인 성찬식을 통한 기도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찬식은 보이지 않는 말씀을 보이게 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교부시대처럼 성례신학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문제가 없지는 않으나 지금 우리 개신교들은 성찬식을 통한 눈에 보이는 말씀의 가치와 의미를 축소 내지는 상실하고 있는 것은 부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끝으로 몸으로 드리는 기도도 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이 아멜렉 족속과 싸울 때 모세가 “양손을 높이 들고” 기도한 것이 바로 몸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또 엘리사가 수냄 여인의 아들을 살려달라고 그 아이 “위에 엎드린 것”도 그 예이다. 또 다윗이 거룩한 성에 법궤가 들어올 때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춘 것”도 몸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신약에서는 사도 요한이 영광의 주님을 보고 그 앞에 “엎드린 것”도 몸으로 드린 기도이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흔한 기도의 자세는 “양손을 펼친 채 완전히 엎드리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기도는 양손을 들고 손바닥을 위로 향하는 것이다.

첫째는 두손을 높이 들어 하나님께 항복하게 하고, 둘째는 바친다는 허신의 뜻이고, 셋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을 받는 다는 세 가지 의미로 손들고 기도한다.

기도의 중요한 것는 “쉬지 말고 기도”(살전5:17)하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가능한가? 만약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바울은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가능할 뿐 아니라 우리의 영성을 위해서 꼭 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인가? 첫 번째 방법은 협력기도(중보기도)하는 것이다. 즉 24명이 릴레이식으로 매일 한 시간씩 기도하면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다.

두 번째는 “개인이 쉬지 말고 기도”하는 방법이다. 이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여러 선배들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다. 예를 들면 브라더 로랜스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보다 더 기쁘고 충만한 삶은 없다”고 했다. 레더의 성 요한은 “숨 쉴 때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성경이 우리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한 사실이다. 바울은 살전5:17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고, 롬12:2에서는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했다. 또 엡6:18에서는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했다. 골4:2에서는 “기도를 계속하고”라고 했고, 빌4:6에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이리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다. 히13:15에서는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했다 예수님도 눅18:11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 시애에도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할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가이다. 교회사를 보면 두 가지로 쉬지 않고 기도하려고 했다. 첫째는 “단숨의 기도”(Breath Prayer)이다. 단숨의 기도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주 예수 그리시도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가 있다. 이것은 눅18:13에 나오는 말씀이다. 동방 기독교의 전통에는 “숨을 내쉬는 기도”라고 하는 단숨 기도가 있다. 그것은 시편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시139:1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는 말씀이다. 따라서 우라가 “주 예수여 제게 은혜를 베푸소서”라든지 “성령이여 나의 죄를 밝혀 주소서” 혹은 “주 예수님, 저로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소서” 같은 단문 형식의 기도를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런 기도은 요청 기도요 자아에 초점을 둔 기도한 점이다. 그래서 더 좋은 방법은 “주님, 주님의 진리대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같은 기도는 참으로 권장할 만한 기도이다.

둘째로 쉬지 말고 기도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매일 매일의 활동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마음속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찬양과 감사를 속삭이듯이 기도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그 방법이 무엇이든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훈련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이 의식 속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셋째는 무의식에까지 박히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점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중언부언 기도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보면 아주 간단한 기도를 반복해서 드렸다(마26:39). 다시 말해 반복해서 드리는 기도와 중언부언하며 기도하는 것은 다르다는 점이다. 무엇이 다른가? 반복 기도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주님의 반복 기도를 보면 아주 짧은 기도를 땀이 피가 되도록 간절하게 드린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기도를 길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이것저것 늘어놓으며 자신이 무엇을 기도했는지도 모르고 길게 엿가락 늘여놓듯이 기도하는 것이 다르다.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아빠 기도”이다. 구약에서는 볼 수 없으나 신약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다는 점이다(막16:36, 롬8:15, 갈4:6). 여기서 “아빠”란 말은 시약성경에 세 번 나오는데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중에 하셨던 말이다(막14:36). 바울은 이 말을 두 번 사용했는데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가리켜 영적으로 부르짖을 때 사용했다(롬8:15, 갈4:6). 이 “아빠”라는 말은 “나의 아버지”라는 아람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 “아빠”란 말은 유대인이 아이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다. 우리말로 정확하게 번역하여 “아빠”란 말이므로 친근한 용어이다. 놀라운 것은 이“ 아바(Abba)”란 말은 구약 어디에도 나오지 않고 오직 주님께서 한번, 그리고 바울이 두 번 사용한 점이다. 이 말은 예수님이 눅2:49에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란 말고 “너는 내 사랑아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에서 그 의미가 잘 나타난다. 가장 잘 나타난 것은 겟세마네에서의 기도이다(막14:36).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성부와의 밀접한 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하려면 세 번째는 “마음의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러면 마음의 기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히 말하면 성령께서 우리 안헤 내주하여 거하시는 것을 말한다. 기도에는 입술로 드리는 기도와 지성으로 드리는 기도와 마음으로 드리는 세 가지 종류의 기도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음의 기도를 드리면 우리 능력의 한계에 도달한다. 말을 하려 해도 말이 나오지 않아 그냥 낑낑거릴 뿐이다. 이때에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의 기도에 개입하신다. 이 시점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양자의 영을 부어 주셔서 그 영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롬8:17~26).

이 마음의 기도에 들어가면 무한한 기도를 하게 된다. 이 때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다. 그것은 레마(마4:4)라고 부른다. 또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다고 할 때에도 레마라는 단어를 사용했다(엡6:17). 다시 말하면 성경을 읽을 때에 때때로 특별한 말씀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레마’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음의 기도를 하게 될 때에 레마와 함께 방언을 체험한다는 점이다.

그러면 방언이란 무엇인가? 성경에 보면 두 가지 종류의 방언이 있다. 하나는 행2장 오순절 때에 했던 외국어 방언이 있고 다른 하나는 일명 천사의 언어라고 하는 방업이 있다(고전13장). 어떤 학자들은 이 방언을 ‘기도의 언어’라고 부른다.

4. 기도의 종류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크게는 두 가지가 있다. 사역을 위한 기도와 필요를 위한 기도이다. 그러나 이것을 좀 더 세분하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단순한 기도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필요한 것이 있을 때 마다 그냥 울기만 하듯이 우리는 교회에 나가면서부터 그냥 아기처럼 떼쓰고 우는 기도만 했다. 그것이 바로 단순한 기도이다. 거의 매번 비슷한 기도를 해왔다. 그런데도 그것이 통했고, 그래서 계속 그렇게 기도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더 성장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왜 기도해야 하는지, 또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경과 목사들의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조금씩 배워간다. 그러나 목사들은 통성기도나 묵상기도나 금식기도에 대해서는 많이 말하지만 기도이 모든 것을 다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여기서 통성기도는 한국에서 토착화된 기도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지만 아무도 속 시원하게 기도이 모든 것을 다 가르쳐주지도 않고, 또 그럴 수도 없다.

두 번째는 묵상기도이다.

지금 많은 경우 침묵의 기도와 묵상기도를 혼동하고 있다. 묵상기도는 침묵의 기도와는 달리 성경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려면 성경으로 충만하고, 성경으로 훈련되어야 한다. 성경으로 훈련되어야 한다. 묵상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성경을 인용하고 사전의 역할을 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성경 공부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묵상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기도하는 마음과 상상력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묵상만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가 성경을 지성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거기에 덧붙여서 감성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상력의 사용을 통해 기만이나 조작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는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라고 권면한다. 감각을 총동원한다는 것은 바다의 냄새나 해변의 물소리나 새들이 날아가는 것을 상상할 때 성경의 말씀을 우리의 피부로 느낄 수 있고, 심지어 예수님의 옷깃을 만질 수도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무언의 기도이다.

무언의 기도는 초신자들은 별로 관계가 없고 평신도 지도자들이나 목회자들에게 꼭 필요한 기도이다. 루이스는 무언의 기도는 영적인 세계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경고했다. 왜냐하면 항상 말만 하는 목회자들에게는 말 중독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무언의 기도가 꼭 필요하다. 시편 기자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시62:1)라고 말한 것도 바로 무언의 기도이다.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보다 무언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몇십 배 더 어렵다. 무언의 기도는 하나님을 응시하는 것이요 천국에 대한 묵상 연습이다. 중요한 것은 무언의 기도의 목표가 뚜렷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연합’에 있다. 요한복음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 나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5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4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언의 기도는 고도의 훈련 없이는 불 가능하기 때문에 조심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루이스도 이 무언의 기도에 실패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무언의 기도를 드리려면 먼저 ‘마음의 평정’에서 시작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복잡한 일들을 다 잊고 침묵하여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우리의 ‘마음이 최상의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시편기자가 “자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 도다”(시62:1)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세상의 일들을 잊어야 한다. 무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장을 아실 뿐 아니라 내가 기도할 내용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얼굴만 보는 자세이다.

무언의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인내심이다.

네 번째는 은밀한 기도(마6:6)이다.

은밀한 기도를 하려면 은밀한 장소를 구해야 한다. 자연을 벗 삼아 기도하는 것은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가장 좋은 전통적 방법이다. 물론 새벽에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는 방법도 있지만 집에서 한 곳을 정하고 기도할 수 있다. 가능한 한 시간은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 좋으며 장소도 한 곳이면 더욱 좋다.

다섯 번째는 묵상기도이다.

무언의 기도와 묵상기도는 비스하지만 그러나 서로 다르다. 무언의 기도는 소리만 내지 않을 뿐 일반기도처럼 찬양과 경배, 감사와 회개와 간구를 한다. 그러나 묵상기도는 주로 성경 말씀을 근거해서 특히 유명한 구절을 중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면 시편23편이나 시편119편97절, 103절 같은 구절이나 그밖에 자기가 암기하고 있는 중요한 성경구절을 놓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묵상기도는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고, 심지어 자신의 상상력을 활용해서 그 말씀의 배경이나 뜻이나 내용을 분해하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말씀의 묵상 가운데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서 대화도 하고, 그의 따뜻한 음성을 들을 수 도 있다.

여섯 번째는 가정 기도(행10:2)이다.

가정은 가장 중요한 제단이다. 그러므로 가정의 제단 쌓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가정 제단의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에서의 기도이다.

가족이 함께 기도하면 자녀들은 부모의 기도하는 모습을 평생 기억하고, 성장해서도 교회생활을 떠나지 않는다.

일곱 번째는 합심기도(마18:19)이다.

이 합심기도가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너희 두세 사람이 함께 있는 곳에 주님도 함께 계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합심기도는 아주 중요하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합심기도는 상대방에게 격려가 되기 때문에 함께 기도하면 서로에게 힘이 된다.

여덟 번째는 공중기도(고전14:14~17)이다.

흔히 말하면 대표기도나 구역에서 드리는 교대로 하는 릴레이식 기도나 소그룹에서 하는 기도가 여기에 속한다. 이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기도할 때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그 기도가 기도하는 사람만의 기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기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응답은 기도자에게 힘이 되고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서게 해준다.

아홉 번째는 금식기도이다.

이사야58장6절에 보면 금식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멈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금식은 이사야 58장6절에서 말한대로 다섯 가지의 유익이 있다. 그서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금식기도는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모든 것에서 자유하게 한다는 것이다.

금식기도의 중요성은 그 기도가 생명을 걸고 기도한다는데 의미가 있고 간절함의 증거라는데 있다.

구약성경에 보면 국가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금식기도를 선포하고 온 백성이 함께 기도한 것을 볼 수 있다(삼7:6, 느1:4, 에4:16,). 그러나 기억할 것은 금식기도가 마술적 힘을 가진 것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금식기도를 통해 체중을 줄이거나 다른 사람들을 조정하려고 들어서는 안 된다.

열 번째는 관상기도이다.

한때 이동원 목사의 관상기도 세미나가 한국 여러 교회에서 유행하다가 이동원 목사가 그의 견해를 접은 후에는 지금은 좀 잠잠해진 상태이다. 감사한 것은 감리교 신학교에서 이에 대한 신학적 연구를 발표한 일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신학적 문제점과 함께 그 대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관상기도는 일명 향심(向心)기도라고도 하고 영어로는 centering prayer라고도 부른다.

감리교 신학교의 이후정 교수는 이렇게 정의했다. “관상이란 말은 원천적으로 플라폰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진선미의 궁극적 이데아 혹은 지고의 실체에 대한 인식과 만남에 목표를 둔다”했다.

관상기도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첫째는 뉴에이지의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둘째는 오리겐을 비롯한 중세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고 있다. 셋째는 레노바레의 영성운동에 직접적인 뿌리를 두고 있다. 퀘이커 교도인 리차드 포스터가 “기도”란 책을 쓴후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운동이기하다. 포스터는 인간의 내면세계에 내적 광명(inner light)이 있다고 보았다. 중요한 것은 포스터가 기도에 대해 여러 가지 좋은 이야히고 했지만 그의 신학적 배경이 심각한 오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의 전적 타락이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왜곡된 해석을 하고 있다. 즉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자체가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내면세계에 내적 광명이 있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넷째로 관상기도는 카톨릭과 뉴에이지의 사상에서 유래된 것이다. 뉴에이지는 위헤서도 언급했지만 동양의 신비주의와 점성술에 근거한 비빔밥 신학이다. 그들은 1960년도부터 시작하여 약2000년 동안은 모든 인간이 신과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는 시기, 즉 물병자리 시대라고 하면서 영성 방법으로 관상기도를 한다.

그러면 관상기도에서 말하는 준비 단계와 절차는 무엇인가? 준비단계는 첫째 정신 중중을 잘할 수 있는 장소를 정할 것, 둘째는 몸은 편안한 자세를 가질 것, 셋째는 어깨에 힘을 빼고 허리는 곧게 펴고 손은 가볍게 무릎위에 올려 놓을 것,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숨을 들이마시고 내뿜는 비율을 1대 2로 한다. 다섯째는 마음의 자리에 초점을 맞출 것, 여섯째는 마음과 정신이 연결 될 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다고 했다. “주여”,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부른다고 했다.

관상기도의 절차는 첫째는 성경을 읽고, 둘째는 주어진 구절을 명상할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통을 하도록 기도할 것이고, 넷째는 관상경험(하나님과 일치의 체험)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열한 번째는 중보기도이다.

중보기도라는 말은 오해하기 쉬운 용어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뿐이기 때문이다(딤전2:5).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과 같은 중보자의 입장에서 기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신 것처럼 주 기도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가 중보자는 아니지만 교회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중보적으로 기도할 수는 있다.

열두 번째는 기도는 호흡기도(Breath Prayer)가 있다.

호흡은 무의식적인 것이다. 호흡기도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호흡 없이 인간은 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호흡 기도에서는 하나님을 산소처럼 생각하고 하루 종일 호흡에 따라 생각하며 하나님을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사도행전17장28절에 보면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기도가 호흡기도이다. 호흡기도는 어떤 면에서 마음의 기도이다. 이 기도 방법은 동방정교회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많이하는 방법이다. 호흡기도의 내용은 누가복음18장39절에 나오는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나 누가복음18장13절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같은 구절을 호흡에 맞추어 반복하는 기도이다.

호흡기도는 아주 단순한 기도이다. 하나님 앞에서 호흡할 때마다. 현존의식을 가지고 호흡의 리듬에 맞추어 드리는 관상기도의 일종이다. 호흡기도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16~18절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호흡이 있는 동안 드리는 기도이다. 특히 호흡기도는 누가복음18장13절, 39절을 근거를 둔다.

5.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1) 예수님의 모범적 기도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제자들에게 가르친 주기도(마6:9~13), 변화산에서의 기도(마17:1~13, 눅9:28~36), 때를 기다리는 기도(마14:22~27), 제사장적 기도(요17장),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마26:36~46), 십자가 위에서의 기도(눅23:34, 마27:46, 요19:26~30)등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는 그 짜임새나 내용이 아주 놀랍다. 특히 찬송가에 나오는 주기도는 우리에게 어떤 순서로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자세히 가르쳐준다. 먼저 기도의 대상이 되는 아버지를 불렀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당시의 문화로는 있을 수 없는 혁명적 표현이다. 물론 이것이(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한 것) 결국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에게 사형 선고를 받게 하는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지만 그러나 이 칭호야 말로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대중기도를 할 때 사람들을 의식하고 하는 기도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도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그러면 그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가? 하늘에 계신다고 했다. 그것은 높고 존귀하신 분임을 표현한 은유적 표현이다. 예수님은 “우리 아버지”라고 했다. 물론 나의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는 점이다. 이렇게 기도한 다음에는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기도하라고 했다. 첫째는 하나님에 관한 것을 기도하고 다음에는 우리에 관한 것을 기도하라고 했다. 그 후에(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주기도문에는 송용이 나온가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나이다. 아멘”. 물론 이 송영는 예수님이 직접 가르친 것은 아니지만 근거 구절은 역대상29장11절 상반절에 나오는 다윗의 기도이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물론 주님께서는 역대상29장11절의 내용을 그대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을 주기도문에 맞추어 “나라와 권세와 영광”으로 잘 요약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대개”라는 말이다. 이 대개(大蓋덮을 개)란 말은 “일의 큰 원칙으로 말하건대”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 부분”이란 뜻의 대개(大槪평미레 개)로 오인하기 때문에 뺀 점이다. 원문을 보면 가르(gar)인데 그 정확한 뜻은 영어의 for, because이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수고가 되더라도 교인들에게 원문의 뜻을 밝혀주면서 그냥 그대로 두든가 아니면 기왕에 새로 번역할 바엔 원문(gar)대로 번역을 했더하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주기도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조금전에도 언급했지만 먼저 하나님께 대한 기도가 나온다. 그 세 가지는 첫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이라고 했다. 여기서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말한다. 따라서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거룩히 여김 받기를 기도한 것이다. 두 번째는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했다. 이것은 이 땅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가 되기를 기도한 것이다. 세 번째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고 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요 우리의 삶의 목적을 언급한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뜻이 성취가 바로 우리의 삶의 목적이며 소망인 것이다.

주기도의 내용은 하나님께 대한 기도 후에 우리의 필요를 따라 기도하라고 했다. 크게 세 가지로 되어 있다. 먼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했는데 이 기도는 일용할 양식의 필요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일용할 양식이란 단순히 양식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넓은 뜻으로 말한 것이다.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통틀어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왜 ‘오늘날’이라는 말을 넣었는가? 그것은 욕심으로 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오늘에 필요한 것을 간구하라는 말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미리에 필요한 것까지 다 간구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점 더 멀어진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가까이서 교통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주님은 여기서 “오늘날”이란 말씀을 하신 것이다.

우리에 관한 두 번째 기도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했다. 인간이 불행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죄의 권세 때문이다. 죄를 범하면 죄의 노예가 되어 자유를 빼앗기기 때문에 이 기도는 인간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아주 중요한 기도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말이 그 앞에 나온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조건부로 우리 죄를 사하여 준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을 닮으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느냐? 그러므로 너희도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라는 것이다.

세 번째 기도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했다. 우리는 악의 위험성을 잘 모른다. 우리는 악의 위험성을 잘 모른다. 악은 사탄이 범죄한 인간에게 뿌린 독약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말은 “죄악”이라는 말이다. 이 둘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죄가 마음으로 짓지만 결국은 악이라고 하는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주기도문 끝에 “아멘”이란 말이 나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본래 아멘이라는 말은 “진실로”란 뜻과 “그렇게 되어지이다”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우리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했을 때 사용한 말이 “아멘”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기도에서의 아멘은 “그렇게 되어지이다”라는 간곡함의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기도한 내용은 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줄로 믿습니다, 라는 뜻이다.

어떤이는 기도에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말을 어떤 마술적 주문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바로 알기 위해서 사도행전19장13~17절의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술사가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도 자동적으로 응답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도 하나님은 이렇게 묻는다. 과연 너는 예수를 믿는가? 그와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는가 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이름”은 마술적 주문이 결코 아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아무것도 우리에게 빚진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간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시 주어야 할 이유가 없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이 “언약적 권위”를 가지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고 주신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달라고 할 자격이 없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요1:12)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즉 그의 권세로만 간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한복음16장23~26절에서 왜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서 “이름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세상에서 우리는 듣기 좋은 이름, 혹은 족보에 나오는 돌림에 따라 이름을 정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이름은 그 사람의 본질을 뜻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정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것이다. 즉 이름은 그 사람의 본성을 상징하였다. 예를 들면 야곱이란 이름은 “속이는 자”라는 뜻이기 때문에 좋지 않은 이름이지만 하나님께서 나중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기까지는 그대로 써야만 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구원자”란 뜻)에는 그와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을 때만 능력이 나타난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만이 하나님께 합법적 경로이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기도의 가르침 가운데 마태복음7장7~12절에 나오는 삼 단계 기도는 우리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기도의 첫 번째 단계는 “구하는 단계이다. ”구하라“(Aiteo).이 구하는 단계는 내 손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내 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단계이다. 자신의 무능함과 처참한 모습을 ”깨닫는 단계“이다. 그때에 우리는 진정으로 구하게 된다. 이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임한다. 왜 구하는가” 내 손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 손에는 너무도 많은 것이 있고,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때에는 진심으로 구할 수 없다. 그 간구는 형식적이 되기 쉽다.

기도의 두 번째 단계는 “찾는 단계”이다. “찾으라”(zeteo)고 했다. 왜 찾는가? 우리가 본래 가졌던 하나님이 주신 것을 분실했기 때문에 찾고, 우리 손 안에 좋은 것은 없기 때문에 찾는다. 우리가 분실한 것은 무엇인가? 예수 믿을 때 가졌던 처음의 사랑이다. 따라서 이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이 주신 것 중에 분실한 것이 있어서 계속해서 “매어달리는 단계”이다.

기도의 세 번째 단계는 “문을 두드리며 기다리는 단계”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다 있음을 믿고 끝까지, 기대하면서 “응답될 때까지 매어달리는 자세”이다. 우리의 기도에서 문제가 무엇인가? 기도한 것을 끝까지 간구하지 않고, 또 기도하고 나서도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데 있다. 그 러나 응답되지 않는 기도란 하나도 없다. 모든 기도는 다 응답된다. 다만 하나님이 원하는 시간에 하나님이 원하는 방법으로 응답될 뿐이다. “Pray to God for the great things, and expect the great thing from God.”(큰 것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큰 것을 주실 것을 기대하라.) 이것은 인도의 현대 선교의 아버지인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가 한 유명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한다(막11:24). 의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약1:6).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주실 것을 믿고, 응답 될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다. 바울이 빌립보서 4장13절에서 한 말씀을 기억하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은 주님께 대한 절대적 믿음과 확신의 표현이다.

(2) 야베스의 기도(대상4:8~10)

성경에는 수많은 기도의 사람이 있지만 야베스의 기도만큼 유명한 것은 없다. 그것은 부루스 윌킨슨(Bruce Wilkinson)의 “야베스의 기도”(The Pray of jabez, 2000)가 출판되면서 그의 이름이 기도의 대명사가 되어 전 세계를 휩쓸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이름을 야베스라고 지었는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어머니의 산통을 통해서 낳아주심을 잊지 않도록 하려고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둘째는 고통으로 인해 흘린 눈물의 가치를 기억하라고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인간의 뇌는 145억 개의 세포로 되어 있고 각 개의 세포는 한 가지씩 정보를 가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 정보를 다 사용하지 못하고 죽는다. 셋째는 낳아주신 부모에게 보답하게 하려고 야베스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러면 야베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유명인사도 아니고, 업적을 많이 남긴 사람도 아니다. 또 남다른 능력의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9절)고 했다. 왜 그를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고 했는가?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성실한 사람이었고, 셋째는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기도의 사람은 정말 귀중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홀로 역사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아하헬 종속”의 조상이었다. 요즘 말로 신앙의 명가를 이룬 것이다. 다음은 그는 “야베스에 살던 서기관(대상2:55) 종족”이었다 따라서 그는 성경에 능통한 집안에 속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 되면 영적 명가를 이루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기도는 경건의 보증 수표이다(10절).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움직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다면 야베스는 어떻게 기도했는가? 첫째로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10절)이라고 했다. 우리말 번역에는 마치 무슨 조건처럼 되어 있으나 원문에 보면 여기서 사용한 동사는 불완전 완료형 동사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달라는 백지수표와 같은 것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이다. 둘째 기도는 “나의 지역을 넗히시고”(10절)라고 했는데 옛날 번역에는 “지경”이라는 말로 되어 있다. 이 지경의 학장은 그 사람의 비전과 하나님의 축복의 결합을 의미한다. 셋째 기도는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10절)라고 했다. 하나님의 손은 어떤 손인가? 오른손은 축복의 손이요 왼손은 저주와 심판의 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오른손으로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힘을 주신다. 그러므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기도의 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정에 얽매이고, 직업에 얽매이고, 목숨과 죄와 사탄에 얽매어 살고 있다. 다섯째로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10절)라고 기도했다. 우리의 근심은 무엇인가? 대부분은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 때문에 근심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야베스의 기도를 어떻게 하셨는가? 10절 하반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고 했다. 야베스의 기도가 응답된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모든 기도는 천사들이 수납하여 하나님께 상달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신다. 기억할 것은 모든 기도는 다 응답된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가?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할 때는 “그래”(yes)하고 응답하신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 미래에 쓸 것을 미리구하면 “기다려라 때가 되면 주리라”(wait) 하고 응답하신다. 그러나 “아니다”(no)라고 하는 것도 응답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가 우리 자신에게 해로운 것일 경우와 하나님의뜻과 반대되는 경우 하나님께서는 “안 된다”하고 응답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도는 다 응답되지만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응답하신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기도가 응답되는 참 영적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이다.

(3) 기도의 방법으로 열 단계가 있다.

첫 번째는 먼저 주변의 시끄러운 분위기를 정리해야 한다. 왜냐하면 골방기도만큼 집중되는 기도도 없고, 응답이 잘 되는 기도도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으로 시작해야 한다(마6:9, 시95:6, 대상29:11~13).

세 번째는 죄를 고백해야 한다(시66:18~19, 잠28:13). 우리의 기도를 가로막는 담은 우리의 죄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감사의 기도를 해야 한다(빌4:6~7).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우리의 감사의 기도이다. 감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우리의 필요를 간구한다.

여섯 번째는 하나님과 그의 약속을 전적으로 믿고 기도해야 한다(막11:23~24).

일곱 번째는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여덟 번째는 기도하고 구한 것은 응답되었다고 굳게 믿어야 한다(막11:24).

아홉 번째는 기도의 응답을 대망해야 한다.

열 번째는 믿음의 생활을 실천하면서 기도해야 한다.

기도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과 만나서 교통하며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발자취를 따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며 갈등과 거짓과 불의와 전쟁이 많은 이 세상에 참 평화와 사람이 넘치도록 섬기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 생활의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실천하면서 기도해야 한다.

(4) 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말3:7~9, 삼상15:2~23, 수1:8, 시66:18)

첫 번째는 우리의 죄이다(약1:21, 사59:2, 요3:22, 요일2:1, 대하7:14).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들의 관계도 담을 쌓게 하고 좋은 관계를 무너뜨린다. 죄는 악과는 다르다. 죄의 결과가 악인 것이다.

두 번째는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이다(요4:18, 요일4:18, 롬5:8, 딤후1:7). 왜냐하면 두려움은 하나님을 피하게 만들고, 관계적 존재인 인간의 모든 관계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우리가 가지 죄책감이다(롬8:1~2, 히7:19, 8:12, 10:14, 16~22). 죄책감을 가지면 더 기도하고 매달려야 하는 데 실제로는 기도를 더 멀리하게 된다. 왜냐하면 죄책감을 가지는 것은 용서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확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기도에 대한 의심이다(약1:5~8). 전에도 기도했지만 이루어주지 않으셨으니 이번에도 응답되지 않을 거야 하고 우리는 의심하기 쉽다. 그러나 의심은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서 마음에 불어넣은 독소이다.

다섯 번째는 잘못된 동기를 가질 때 기도는 방해를 받는다.

기도는 나의 뜻을 구하기도 하지만 그 기도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기도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욕심으로 구하게 되는 것이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 기도의 진정한 목적이다.

여섯 번째는 마음에 품은 원한이다(시66:18, 엡4:31~32, 히12:15).

일곱 번째는 남들을 용서치 않는 것이다(막11:25, 마6:15).

여덟 번째는 잘못된 가족관계이다(마5:23~24).

아홉 번째는 우상숭배이다(겔14:3, 신6:5).

열 번째는 타인에게 원한을 샀을 때 우리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다(잠21:13)

(5)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어떤 기도인가?

첫째로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는 기도이다. 기도의 신학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기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과 함께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나이의 그레고리는 기도는 세례라고 표현했다. 왜냐하면 세례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외적 표시이듯이 기도는 예수를 믿는 사람의 표시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기도여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기도란 “자아를 허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의 성곽이 무너질 때, 비로소 우리의 비전이 확장된다. 따라서 기도는 우리를 올바르게 세워준다.

셋째로 기도를 통해 모든 것을 다 영적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기도를 통해서 이기적인 자신이 변하고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게 된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가 손으로 하는 노동이 기도를 통해서 점차적으로 성화되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기도하는가? 성 어거스틴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그 사랑의 표현이 바로 기도라고 했다. 마치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면 대화를 하고,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대화가 더욱 깊어지듯이 기도도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비례하여 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기도를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식었거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B. 성경 연구를 통한 영성 개발을 해야 한다.

영성 개발을 위한 두 번째 단계는 “말씀에 초첨을 두어야”한다. 왜냐하면 성경을 떠나서 여성의 정의나 방법이나 목적이나 결과나 무엇 하나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말씀은 전신갑주 가운데 유일한 공격용 무기이기 때문이다.

영성 개발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과 목표가 하나님에게까지 올라가고 닿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깊은 성경 연구가 중요하다.

성경을 체계적으로 묵상하면 그 내용을 외적으로 확대하기도 하지만 또 내적으로도 강화해 준다.

간단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네비게이토의 교재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1. 말씀 듣기

말씀 듣기에 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 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먹게 하리라”(계2:7). “이르기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렘22:2).

그러면 어떤 태도로 성경을 들어야 하는가? 즐겁게 들어야 한다.(막12:37). 다음은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여야 한다(막7:24).

다음으로 말씀을 들을 때의 유익은 무엇인가? 첫째로 믿음이 생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둘째로 깨닫게 하며 축복이 된다(계1:3).

그러면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첫째는 예배를 통해서 정기적으로 듣고, 둘째는 성도들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해서 듣는다. 기도 모임이나 성경 공부나 개인 교제 같은 것을 통해서 들을 수 있다.

2. 말씀 읽기

말씀 읽기에 관한 성경적 교훈은 신명기17장19절에 나온다.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레를 지켜 행할 것이라”. 요한계시록1장3절에는 말씀을 읽는 나와 축복과 그 이유를 밝혀준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왜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디모데전서4장13절, 요한계시록1장3절, 사도행전20장32절, 에베소서6장19절에서 바울은 성경을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 했고, 계시록에서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재림의) 때가 가까움이라”고 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우리들을 든든히 세워주어 하늘의 기업이 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3. 성경공부

그러나 성경은 읽은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성경은 반드시 공부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을 공부하지 않고는 말씀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디모데후서2장15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온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그래야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뢰아의 교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행17:11)했던 것이다.

성경 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 이 목표를 위하여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성경은 보는 사람의 목적에 따라 우리에게 임하는 내용이 다르다는 점이다. 목회자에게는 설교의 내용이 나오고, 교인들에게는 은혜의 말씀이 나오고, 신학자들에게는 문제되는 난해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 공부는 성실해야 하고, 진지해야 하며, 지혜를 구하는 마음과 말씀을 삶 가운데서 실천해 나가는 마음으로 해야 변화가 일어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마침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물론 성경 공부는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교수법으로 하는 것이 좋으나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몇 가지 근본 조건들이 해결되이 않고 시작했기 때문이다. 첫째로 바른 그릇으로 준비되어야 한다(딤후2:21). 그것은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딤후3:16). 셋째로 말씀에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한다(벧전2:2). 즉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성경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첫째는 성경을 최고 권위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라(요7:16, 딤후3:15~16). 둘째는 진리 전달의 수단으로 사용하라(요8:31~32). 셋째는 영적 싸움의 무기를 삼으라(엡6:17). 그래서 미국의 초대 대통령 이었던 워싱턴은 “하나님과 성경 없이 이 세상을 올바르게 통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고백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이 좋은가? 첫째는 주 단위로 성경을 정기적으로 공부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떼어 놓아야 한다. 둘째로 성경 그 자체를 공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 대해서 공부한다. 셋째로 성경에서 발견한 사실들을 기록하라. 희미한 잉크가 명확한 기억력 보다 낫기 때문이다. 넷째로 깨달은 것은 반드시 생활에 적용하라. 그래서 성경의 축복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 이해의 원리는 무엇인가? 첫째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이에 대하여 성경은 성경에서 가감하지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계22:18~19). 둘째로 성경 이해의 필수적인 것이 두 가지가 있다. 보혜사 성령께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요14:26).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한다(고전2:13)는 점이다. 셋째로 성경 자체가 성경을 잘 해석해 준다. 사실 성경에는 짝이 있고, 난해한 구절을 해석해 주는 구절들이 어디엔가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주 성경을 가지고 관주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좋다.

4. 성경의 암송

성경의 말씀을 암송하면 읽은 사람의 인격이 말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놀랍게 변화된다. 그뿐 아니라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는 능력이 생기고, 전도할 때 꼭 필요한 말씀을 기억나게 해서 그 시점에 꼭 필요하고 유익한 말씀으로 준비시켜준다. 성경 암송을 통한 유익을 성경은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암송한 말씀은 마음의 일부가 되고, 그러기에 생명의 근원이 말씀에서 생기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나라”. 무슨 말인가? 마음의 생각은 암송된 말씀에 따라 결정되고, 그것은 마침내 생활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명기6장6절에서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라고 권면한 것이다.

성경 암송은 마치 화살 통에 화살을 채워 두듯이 사탄을 대적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된다. 마태복음4장1~11절에 보면 주님께서 어떻게 사탄을 물리쳤는지 기록하고 있다. 바로 암송된 말씀이다.

그러면 암송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첫째로 기쁨과 즐거움으로 대해야 한다. 예레미야16장16절에 보면 예레미야는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라고 했다. 둘째는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시편119편97절에 보면 시편 기자가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말씀을 사랑할 때에는 그것을 작은 소리로 노래하듯 읊조리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말씀을 항상 묵상하고 그 기록된 대로 실천하고 살아야 한다.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고 했다. 네 번째는 말씀이 항상 꿀처럼 달아야 한다. 시편119편103절에 보면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고 했다. 언제 주의 말씀이 단가? 깨달았을 때 달고, 말씀을 묵살할 때 단 맛이 난다.

말씀을 암송한 후에 오는 신령한 복은 무엇인가? 첫째는 지혜를 줄 뿐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둘째는 말씀이 우리를 인도하여 주며 보호해 준다. “그것이 내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잠6:22). 셋째는 세상을 살아갈 때에 실족함이 없게 해준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시37:31). 넷째는 행실을 깨끗게 하여 주고 주께 범죄하지 않게 해준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119:9).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11). 다섯 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게 해 준다.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잠3:3~4). 여섯째는 많은 열매를 맺게 해주고, 형통케 해준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이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일곱째는 영혼을 소성시키고 지혜롭게 하며 눈을 밝게 해준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경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시19:7~8).

그러면 구체적으로 성경을 암송할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먼저 생명을 지켜준다(잠4:23). 다음은 선한 마음을 갖게한다(신6:6). 끝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마음에 새기게 한다(신6:6).

성경을 대할 때 놀라운 신령한 복이 임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게 되며 찬송과 감사가 충만케 된다(골3:16). 둘째 잠언6장20~22절의 말씀처럼 우리를 “인도하며, 잘 때에도 보호해 주고 깰 때에도 더불어 말하”게 한다. 셋째 날마다의 “걸음이 실족하지 않도록” 인도해 준다. 넷째 우리의 마음을 청결케 해주고 범죄하지 않도록 인도해 준다(시119:9, 11). 다섯째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는다. 여섯째 모든 일에 형통함을 준다(시1:1~3). 일곱째 “말씀의 빛으로 인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해준다. 여덟째 우리의 영혼을 소성 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눈을 밝게 해준다(시19:7~8).

5. 말씀의 묵상

말씀(Logos)이 지식에서 끝나지 않고, 그것이 인격이 되고, 살아서 움직이는 능력(Dunamis)이 되려면 로고스가 레마(Rema)가 되어야 한다. 레마가 되지 않은 말씀은 율법이나 지식이나 교리로 끝나고 만다. 그것은 말씀의 묵상에서 온다.

목회자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말씀의 묵상 시간이다. 특히 강대상 밑에서 말씀을 묵상하면 가슴이 펄럭거리는 체험이 되고 그것이 강대상 위에서 전파 될 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다. 설교자가 자기 자신이 감격이 안 되는데 청중들이 은혜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고, 사기꾼이 되는 것이다.

C. 영성 개발의 마지막 단계는 영성 훈련이다.

훈련이 없는 이론은 백해무익하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마지막으로 하신 지상명령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0)고 했다.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것을 “지키게 하라”고 한 것은 훈련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성 훈련은 간단히 말하면 제자도의 실천이요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것이요 선교하는 데 있다. 여기서는 뜨레스 디아스(Tres Dias)에서 하고 있는 영성 훈련의 방법과 지금 많은 교회에서 하고 있는 제자 훈련의 방법 등을 소개하려 한다.

1. 1950년대 이후에 일어난 뜨레스 디아스를 통한 영성 개발 방법이 있다. 물론 그 유행은 한물갔지만 그러나 그 운동이 왜 나오게 되었는지, 거기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뜨레스 디아스는 1940년 가톨길에서 시작한 영성 훈련인 꾸르실료(Dursillo)가 개신교에 도입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뜨레스 디아스는 스페인어로 “사흘”이라는 뜻이다. 3박4일의 독특한 프로그램에 의해 실시된다. 3일 동안 크리스천의 기본이 되는 체험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고 소명을 깨달아 알게 하고, 응답하는 체험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영성 훈련은 가톨릭에서도 20년간의 내용 변경과 실행상의 문제점들을 수정 보완한 것이란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사실 뜨레스 디아스는 가장 각광받는 평신도 영성 훈련이다. 한국에는 1967년 5월에 한국 가톨릭에 도입되었다.rollo라고 하는 15개의 주제별 강의 제목을 보면 뜨레스 디아스의 내용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①삶의 이상 ②은혜 ③교회 ④성령 ⑤경건한 신앙 ⑥성경 공부 ⑦성례전 ⑧그리스도 안에서의 행동 ⑨은혜의 방해 요소 ⑩지도자 ⑪환경 ⑫은혜 안의 생활 ⑬크리스천의 공동체 생활 ⑭새 공동체 모임 ⑮4번째 날.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 실시하는 내용을 보면 조금 다르다. 예를 들면 ①묵상기도 ②성찬식 ③편지 보내기 ④선물 보내기 ⑤특별 기도회 ⑥세족식 ⑦회개한 죄목 태우기 ⑧촛불 길 걷기 ⑨사랑의 포옹 ⑩아침 만남의 시간 ⑪침묵 훈련 ⑫개인 고백의 시간 ⑬간증 시간 등 다양하다.

여기서 우리는 띠아스 디아스를 신학과 목회학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하할까? 예장 통합 총회에서 뜨레스 디아스에 대해 내린 결론에 신학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내용을 받아들인다.

먼저 뜨레스 디아스의 긍정적인 면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짧은 시간의 훈련을 통해서 신앙의 감격과 섬김의 훈련 경험을 갖게 하고 봉사와 충성의 결단을 높여 준다는 점에서 좋다. 둘째는 비록 가톨릭에서 시작된 프로그램이지만 내용의 수정과 보완만 한다면 한국 교회의 영성 훈련에도 큰 자극과 도전이 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뜨레스 디아스에 조심할 것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첫째는 한국에서는 각 단체마다 자의적으로 변형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이단과 관계가 있는 단체인지 아니면 불건전한 단체에서 하는 것인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

둘째는 이단에 속한 단체일 경우는 그들이 이 영성 훈련을 세력 확장의 방편으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당회장의 추천 없이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셋째는 기성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훈련에 참석한 경험자들이 신앙적 교만으로 파당을 일으키는 예가 있어서 교회의 분열의 위험성도 있기 때문에 당회장의 치밀한 지도가 필요하다.

넷째는 세례 받지 않은 초신자들이 뜨레스 디아스의 모임에 참석했을 경우 세례 의식에 참석했을 때 교회의 규정에 어긋날 가능성이 있고 더욱이 포용 훈련, 그것을 “아브라조”라고 하는데 이런 가톨릭 용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더구나 한국에서는 남녀 간에 함부로 포용하는 것은 영성 훈련이 아니라 방탕 훈련이 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몇 지 제언을 한다면,

첫째는 이 영성 훈련 프로그램이 교단으로부터 인준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회장의 허락과 추천 없이 하는 것은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되므로 주의가 요하는 영성 훈련임을 기억해야 한다.

뜨레스 디아스 운동을 복음 안에서 긍정적으로 보완하고 발전시켜 교회 성장에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2. 여러 가지 제자 훈련 방법이 있다.

첫째로 열방대학에서 실시하는 훈련은 제자 훈련은 물론 섬김의 도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

둘째로 하용조 목사와 옥한흠 목사를 비롯한 여러 교회에서 실시하는 제자 훈련 방법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주님의 제자를 양육해야지 목회자의 제자를 양육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이형자 권사가 기도를 통해 개발한 횃불회를 활용하는 방법이다. 각 지역마다 횃불회가 있으므로 이 횃불회를 통한 훈련을 통해서 네 가지 불을 가질 수 있다. 첫째는 기도의 불, 둘째는 말씀의 불, 셋째는 선교의 불, 넷째는 부흥의 불이다.

D. 영성 개발은 섬김과 선교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처럼 낮아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Lord)라고 고백하는 것은 첫째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예배하는 것이며 둘째는 예수님의 종이 되는 것, 즉 그를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13장13~1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 당시에는 손님이 오면 발을 씻어 주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었는데(당시에는 먼지가 많았기 때문에 눈병 든 사람들, 즉 맹인들이 많았다.) 그것은 종이 하는 일이었다. 처음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려 했을 때 제자들이 거절한 것은 종이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 섬기는 삶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셨다.

1. 제자 됨과 섬김의 삶은 무엇인가?

“제자”라는 단어는 서신들을 제외하고는 복음서 어디에나 나오는 말이다. 헬라어로 “마세테스”로 문자적 의미는 ‘배우는 자’이다. 신약시대에 그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첫째는 특별한 학파 또는 전통들을 추종하는 자들로 간주 되었다. 예를 들면 바리새인들의 제자들, 또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말할 때 사용되었다. 둘째는 이스라엘에서 랍비가 다른 이들을 훈련시키게 하는 전통적인 관계 속에서 예수님이 선택한 12제자들을 지칭하였다. 셋째는 광법위하게 예수님을 지지하는 자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즉 믿는자(요8:31, 13:35, 15:8)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이라고 불리운 자들이 다 전적으로 헌신된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6장66절에 보면 예수님을 따랐던 자들 중에도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에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제자라고 할 때 그것은 마태복음28장19절의 의미를 말한다. 즉 완전히 헌신되어 순종하는 자들이라는 뜻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제자란 말은 예 자아(본능을 중심으로 살던 자아)를 버리고 주님의 속성과 본질을 따른 새로운 자아로 바뀌어 지는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옛 자아)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고 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게 될 때에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매일의 삶에서 날마다 죽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복음서에 그처럼 자주 나오던 제자란 말이 사도행전에 보면 그 빈도가 적고, 서신서들에서는 완전히 빠져있다는 점이다. 무엇 때문인가? 에베소서4장22절~24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따라서 복음서와 같이 제자란 용어는 나오지 않지만 제자가 가져야 할 훈련 과정으로 대체되고 있다. 서신들은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한 가족으로 보고 있다. 즉 형제자매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몸으로 보고 있다(엡4:16). 따라서 은사를 강조한다(히10:24~25). 복음서와 서신에서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지체 의식을 더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간단하게 표현하면 목표는 복음서나 서신이나 똑같이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 핵심이 복음서에서는 십자가를 지라(예수님의 말씀에 순종)고 했으나 서신에서는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예수님이 말씀에 순종)고 서신에서는 좀 더 넓은면에서 “제자도”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 과정을 보면 복음서에서는 한 랍비와의 관계요 소규모 그룹 속에서의 “제자도”를 말씀한 반면에 서신에서는 “지역 교제”를 강조하면서 “가족과 몸의 관계”로 “제자도”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제자 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섬김의 도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점이다. 구약에서는 “에베드”(ebed=종, 노예로 번역됨)라고 했는데 섬기다라는 뜻이 더 정확하다. 강조형은 “아바드”인데 그 뜻은 “강제로 섬기게 하다” “노예로 만들다”라는 뜻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섬기는 자 즉 종이란 말은 ①주인의 재산의 상속(창15:2)자 ②주인의 대를 잇기도 하고(대상2:23~35) ③안식일에는 노동의 금지도 받고(출20:10) ④매년 7년 되는 해에는 무상으로 해방되기도 한다(신15:12). 또 다른 동사는 “샤라트”로서 뜻은 “섬기다”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섬김의 도는 결코 비천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종을 높아지게 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이사야서에 나타난 “여호와의 종”의 개념이다. 왜냐하면 섬김의 도에 관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종이 어떤 사역을 할 것인가를 기록하고 있다. 첫째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함을 입게 될 것이라고 했다(1절).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둘째로 2절에서는 그의 겸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셋째로 4절에서는 그가 세상에 정의를 세울 것이라고 했다.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넷째로 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종을 보호할 것이라고 했다. “내가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다섯째로 7절에서는 그 종은 “눈먼 자들의 눌을 밝히며 갇힌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고 했다.

다음 이사야서49장1~6절에서는 하나님의 신뢰할 수 있는 종으로서의 선포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며(3절), 그는 헛되이 수고를 할 수도 있으나(4절),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하고, 이방인의 빛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베풀어 땅 끝까지 이르게 할 것(6절)이라고 했다.

또 이사야50장4~10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을 계속해서 안내하신다고 했다.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기를 깨우치사 학자들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6절에서는 그의 종이 당할 고통까지 말씀하고 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맏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을 도우시며(9잘),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마침내는 그의 종을 통하여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끝으로 여호와의 종에 관한 가장 중요한 구절은 52장13절~ 53장12절의 말씀이다. 그는 비록 인간의 모양으로서는 고통으로 말미암아 거절을 받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52:13).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구하게 되리라”. 53장에 나오는 구절들은 고난주간 때에 반드시 읽혀지고 설교 되어지는 구절이다. 여호와의 종은 멸시를 받고 싫어 버린바 되며 형벌을 받고 인간들의 허물을 위하여 죽으시는 속건제물로 되겠지만 그의 종은 죽은 후에 다시 부활히게 되어 그의 노력의 소산을 보고는 높이 들여지게 된다고 했다(11~12절).

여호와의 종에 관한 위의 구절들은 첫째로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예수님에 관한 속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다음은 신약에서의 섬김의 도에 대한 구절들이다. 헬라어로 “둘류오”(doulow)라는 말은 “노예로 섬기다”라는 뜻이다. 동사 “디아코네오”(diakonew)는 단순히 “섬긴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다른 명사들과 합하여 여러 가지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식탁에서의 섬김(눅10:40), 도움이 필요한 형제들을 위한 부조를 모으는 일(행11:29, 고후8:4), 그리스도의 말씀을 나누는 일(딤전4:11, 고후11:8)등에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위의 두 단어의 사용에서 큰 차이점은 당시 헬라인들은 이런 형태의 섬김을 수치스럽고 비천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함으로써 종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다시 말해서 섬김을 존귀한 것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섬김의 모범을 주님에게 배워야 하고 그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의 섬김의 도에 대해 가장 잘 가르친 것은 마태복음20장17~34절의 말씀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처음에는 높아지려고 싸우고 경쟁했지만 주님은 마태복음20장25~28절에서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 가장 존귀함을 일깨워주셨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20:26~27)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려 하는 자들은 섬김의도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섬김의 도란 결단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돕는 것이란 점이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2장3~4절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하라”. 그러면서 바울은 빌립보서2장5~8절에서 주임의 케노시스(kenosis), 즉 겸허설을 말씀하고 있다. 성경에는 그 구절을 “자기를 비워”(2:7)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기를 중지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주님의 절대적 겸손을 뜻하는 말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케노스(kenos)를 은유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고전1:17, 9:14, 고후9:3). 중요한 것은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은 신성과 여러 가지의 속성을 가지고 계시다고 기록하고 있다(마1:23, 11:27, 막1:11, 요3:13, 롬1:4). 주목할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 교리에는 예수님께서 계속 신성을 가지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케노시스란 로고스가 인간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자기제한”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니믕ㄴ “영원하고 일시적인” 형태로 존재했으며 또한 “무한하고 유한한” 형태로 존재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며, 100% 사람이셨다.

주님을 따르는 자의 섬김의 도는 우리 자아의 욕구를 충족 시키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종들에게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계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들이 된다는 것은 겸손함을 지닐 것과 하찮은 대접을 받기도 하고 교회의 이목을 끌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섬김의 도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가?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첫째는 섬김의 도를 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알아야 한다. 둘째는 다른 사람들의 정서와 감정을 예민하게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종은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대해 민감하고 실제적인 방법으로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셋째는 우리가 개인적인 우선권을 세우고 그것을 지켜나가야 한다. 무엇을 제일의 자리에 놓아야 하는가? 나의 계획, 나의 욕망, 나의 필요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자신의 관심사를 제쳐놓고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기꺼이 들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제자의 도와 마찬가지로 섬김의 도 역시 전적으로 헌신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섬기는 삶이란 무엇인가?

(1) 여섯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다(요3:30). 둘째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셋째는 예수님을 전파하는 것이다(고후4:5, 사42:1). 넷째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다(고전10:33). 다섯째는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삶이다(막10:45). 여섯째는 주인을 돌보는 것이다(창9:2).

(2) 우리는 왜 섬겨야 하는가? 그리고 섬김의 대상은 누구이며 어떤 태도로 섬겨야 하는가? 먼저 섬겨야 할 이유는 첫째로 주님께서 섬기는 마을을 가지라고 했기 때문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빌2:5). 둘째는 예수님의 주 되심을 전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고후4:5). 셋째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하기 위해서 이다(고전10:33). 넷째는 모든 성도들은 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엡4:13).

(3) 누가 우리의 섬김의 대상인가? 첫째로 모든 사람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른 자는 다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행2:21). 둘째로 믿음의 가정들을 섬겨야 한다(갈6:10). 어떤 태도로 섬겨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믿음과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엡1:15). 끝으로 상대방을 부요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고후8:9).

섬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성의 열매로서 그것이 사회에서의 사랑 실천과 선교에 비례한다.

(1) 사랑의 실천

조지 휫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영혼에 넘쳐흐르자마자 어떤 교파를 막론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

첫째, 사랑의 원천(요일4:10, 19, 요3:16):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계시고 하나님은 사랑 안에 머무실 뿐 아니라 사랑이 그의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한다(헨리 드러몬드의 말이다).

둘째, 사랑의 대상(막12:29~30, 시18:1, 막12:31, 요일4:20, 딤전5:8, 눅6:27, 막5:44): 사랑의 대상은 사람들뿐 아니라 심지어 자연까지도 포함되어야 한다. 창세기1장28절에 “땅을 정복하라”는 구절은 원문에 가깝지 못한 번역이다. 땅을 경작하라. 좀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문화명령으로 해석해야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정복만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자연을 개발한다는 미명하에 자연을 훼손하고 있다. 그 결과 자연으로 인한 재앙은 인간의 생명까지 위협하고 있다.

셋째, 사랑의 원칙(요13:15, 34): 예수님의 사랑이 가장 잘 나타난 곳이 바로 십자가이다. 주님은 사랑의 실천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람이 없나니”(요15:13).

넷째, 사랑의 십계명을 기억하자.

① 에베소서1장4절 하나님의 선택은 사랑의 실천을 위한 ② 에베소서3장17절 사랑의 뿌리와 터는 믿음에서 시작 됨 ③ 에베소서장2절 합당한 생활은 사랑 가운데서 오래참고, 서로 용납하는 것 ④ 에베소서4장15절 표준은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성장하는 것 ⑤ 에베소서4장16절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고 자라야 함 ⑥ 에베소서5장2절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 같이 사랑으로 온전한 제물이 되어야 함 ⑦ 골로새서2장2절 사랑 안에서 연합할 것 ⑧ 고후6장6절 거짓이 없는 사랑이어야 함 ⑨ 유다서21절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켜야 함 ⑩ 로마서13장10절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2) 끝으로 선교 훈련이 영성 훈련의 결론이며 열매이다.

불행하게도 종교개혁기에는 선교에 힘을 쏟지 못했다. 그것은 첫째로 선교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했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둘째는 교회가 가톨릭에 비해 너무 미미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유럽의 개신 교회는 아시아, 아프리카와 고립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개신 교회는 18세기까지는 가톨릭 교회에 그 주도권을 빼앗기에 되었다. 경건주의가 일어나면서 그 분위기는 바뀌었다. 경건주의의 시조는 필립 슈페너(Phillp Spener:1635-1705)이다. 경건주의의 요점은 전도의 열정이 없는 한 선교의 비전이 있을 수 없고, 개인적 경건의 생활이 없는 한 전도의 열정이 있을 수 없으며 진정한 회심의 체험이 없는 한 개인적 경건의 생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경건주의지들 사이에서 자연히 선교의 열정이 살아났다.

그 후 영국에서 근대 선교 운동이 일어났다. 1649년에 창설된 복음선포회가 일어났다. 본래는 북미의 인디언 선교를 위해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파송된 최초의 선교사는 존 엘리오트이고, 요한 웨슬레도 이 단체 후원으로 조시아 주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근대 선교의 아버지는 윌리엄 캐리(1761-1834)이다. 그는 1792년에 “이교도의 회심을 위해 수단을 사요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관한 조사”라는 87쪽의 책을 출간했는데 그의 선교에 대한 확신을 볼 수 있다. 이 책은 마틴 루터의 92개조와 비교할 수 있는 책이다. 캐리는 1793년6월13일에 인도로 출발하여 40년 동안 선교 사업에 종사하였다.

19세기에 와서 라틴 아메리카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체제는 점차적으로 쇠퇴하였으나 다른 지역에서는 확장되었다. 유럽 국가의 침투에는 외교관과 상인과 선교사의 세 그룹이 들어갔기 때문에 피선교지 국민들에게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식민주의로 보이기도 했다. 19세기는 선교의 위대한 세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많은 선교사들이 나타나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세기 후반에 발생해서 20세기에 많은 열매를 맺은 대표적인 세 운동은 신앙 선교운동(Faith Mission Movement)과 성서 학원 운도(Bible Institue Movement)과 학생 자원 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이다. 신앙 선교 운동은 모든 필요한 것의 공급을 주님께 의지하는 선교이다. 19세기에 발생해서 지금까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대표적인 단체로 위클리프 성서 번역협회(Wycliffe Bible Translators)와 대학생 선교회(Campus Crusade for Chist, 1951)가 있다. 이 운동의 특징은 계속적인 동적 성장, 창조적 선교 활동, 예를 들면 방송, 성경통신 과정, 영화 등에 의한 전방위적 선교활동이다.

성서 학원 운동은 무디 성서 학원(Moody Bible Institute, 1886)이다. 졸업생중 5,400명 이상이 전 세계에서 활동을 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일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많은 대참사가 일어났다. 이 20세기는 역사에서 최초로 세계 대전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 전쟁과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서 수많은 종류의 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국제연맹과 그 계승자인 UN의 설립을 들 수 있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1910년 에딘버러에서 일어난 국제적 선언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 운동은 불행하게도 한국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다.

현재까지 연구된 것 가운데 중요한 것은 첫째 복음과 문화의 관계에 대한 선교학적 연구이다. 여기서 1960년대의 토착화(Indegenization)와 1970년대의 상황화(Contextualization)가 선교의 주의제로 나타났다. 더욱이 성육신적 선교의 접근이 강조된 것은 선교사는 이중문화에 적응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선교 지역 문화 속에서 그 곳 사람들과 어떻게 일체감을 가지고 적응해야 하는가에 대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선교란 무엇인가? 선교란 말은 13세기 가톨릭교회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도원의 수사를 선교사라고 불렀다. 즉 세상에 보냄을 받아 세상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해외에서 복음을 전하면 선교(Mission)이고, 국내에서 복음을 전하면 전도(Evangeoism)라고 불렀다. 그러나 북한 선교, 의료선교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선교란 말은 국내의 여러 곳에서동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하나님의 선교란 개념이다.

(3)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선교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역사로서 그의 선교는 세 가지 형태로 표현된다고 말한다.

첫째,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펴는 창조적 활동에서 시작된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배신한 인간과 화해하기 위해서 구약 시대에는 예언자들을 보내시고, 신약시대에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고 그의 부활을 통해 역사의 부조리와 죽음에 대한 승리를 하게 하신다.

셋째, 하나님과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케 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가 성취되도록 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본질이며 창조질서의 회복이다. 하나님의 구원 활동은 인간들을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키고 동시에 불의한 사회, 경제, 정치적 세력에서 해방시키며 빈곤과 정신적 고뇌에서 해방시키고, 사회적 구원을 이루시는 것을 하나님의 선교라고 말한다. 그러나 선교의 개념을 너무 광범위하게 정의 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바리엘하우스는 말하기를 “만약 모든 것이 선교라면 아무것도 선교가 아니다” 이 광의의 선교인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 해방신학, 여성신학 등 수많은 신학이 탄생했다. 그것이 부조리한 현실의 개혁을 위해 잠정적으로 필요했으나 그것이 선교의 본질은 아니다.

① 그러면 무엇이 선교인가?

좁은 의미의 선교는 마태복음 28장18~20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고, 복음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가족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선교는 요한복음17장18절, 20~21절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성도들이 다 선교사이며 따라서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각기 다른 일터에서 섬기는 데서 예수의 향기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② 선교의 명령

선교는 어디서, 누구에게 하는 것인가?(행1:8, 눅24:47). 선교사는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시96:3, 10, 막16:15). 선교는 누구에게 하는 것인가?(막16:15, 마28:19). 이 질문은 선교사 자신은 물론 신학자들에게 끝없는 연구의 대상이 될 것이다.

③ 선교의 주체(갈6:1~12, 요6:44~45, 행1:8)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말씀은 선교의 주체는 성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보혜사 성령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

④ 선교의 동기(요3:16, 고후5:14~15)

왜 우리는 선교를 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전서2장9절에서 베드로는 우리의 신분을 말씀한 후에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바로 선교를 언급한 것이다. 또한 선교는 하나님의 뜻이요 그를 기쁘게 하는 방법이다. 그뿐 아니라 선교는 우리의 믿음을 활성화하고,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사명이기

때문이다.

⑤ 선교사의 개념(요17:18, 20:21)

넓은 의미에서 믿는 모든 사람들이 선교사가 되어 가정에서, 사업 터에서, 전문직에서, 기도와 선교비를 통해서 여러 가지로 선교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다. 따라서 과거 한국 교회가 구호에 삼았던 “가라 아니면 보내라”는 말은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은17장18절, 20장21절의 말씀은 믿는 모든 사람이 선교적 사명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선교사로 보내는 주체가 ‘우리’아니라 바로 ‘주님’ 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맺는 말

영성이라는 단어가 기독교의 유행어가 된지 오래다. 영성이라는 말을 쓰지 아니하면 영성이 없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게리 토마스는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는 책에서 자연주의 영성, 감각주의 영성, 전통주의 영성, 금욕주의 영성, 행동주의 영성, 박애주의 영성, 열정주의 영성, 묵상주의 영성, 그리고 지성주의 영성의 9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영성을 추구하는 단계이지 영성 자체는 아니다.

개혁주의 영성은 이러한 신비주의적인 개인적 영성도 아니요, 또한 세속적인 해방의 영성도 아니다. 개혁주의 영성의 근거는 종교개혁을 통해 중세의 그릇된 영성을 바로잡은 개혁주의자들의 경건속에 묻어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건전한 지식을 깨닫고, 두려움과 신앙하는 가운데 살아온 개혁자들은 경건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 균형 잡힌 기독교 영성을 이해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자들의 수고는 시간이 지나면서 합리주의의 영향하에서 퇴색되었다. 지적활동에 중심을 둔 교리수호의 열심은 결국 개혁주의 영성이 가진 생명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또한 현대주의라는 이성, 과학만능의 시대 배경속에서 교회는 결국 스스로 도망치며 성령운동을 따르거나, 무분별한 적용으로 세속적 신학을 따르는 이원론에 다시 한번 빠지게 된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카톨릭의 제2바티칸 회의를 중점으로 “영성”이라는 용어가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에는 종교다원주의라는 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대 영성”을 교회가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개혁주의 영성을 위해 오늘날 새로 대두되는 “현대 영성”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개혁주의자들의 경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개혁주의 영성을 회복시켜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개혁주의 영성의 특징은 무엇보다 ‘계시중심의 신학’을 바탕으로 하며, 오직 은혜를 강조하는 그리고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지켜나가는 공동체적이고 개인적인 영성이다. 이러한 개혁주의 영성은 현실을 인정하는 내재적 경건이며, 동시에 초월성을 인정하는 성화의 영성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개혁주의 영성은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닮는 영성을 목표로 삼는다.

현대인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조급병이다. 리처드 포스터는 “조급함은 마귀적인 것이 아니라 마귀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서서히 성장하는 것보다 급성장을 좋아한다. 그러나 결코 한 순간에 이룰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거룩한 영성이다. 하나님은 귀히 쓰시길 원하는 사람마다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여 철저하게 훈련하셨다. 하나님은 요셉을 정금 같이 쓰시기 위해 13년 동안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하게 했다. 모세를 훈련시키기 위해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했다. 여호수아를 쓰시기 위해 모세의 시종으로 40년을 기다리게 했다. 하나님은 존귀하게 쓰시기로 작정하실수록 거룩한 삶을 위해 많은 준비를 시키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쓰시기 위해 거룩한 영성 훈련을 시키고 있음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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